한줄 詩

겨울 저녁의 시 - 이제하

마루안 2018. 12. 23. 18:58



겨울 저녁의 시 - 이제하



삼각모를 쓴 쬐깐
바라크 들창과 들병이네 방과
빈대떡집과 굴뚝과 하아라한
저 아름다운 연기


섣달 저녁답을 걸어갈 때는
예편네와 간밤에 통정(通情)을 하고
싸구려, 싸구려를 낄낄대는 장돌뱅이들의
울트라마린, 에메랄드 그린의
울음 섞인 목청과
눈감은
파리한 여자와


섣달 저녁답을 걸어갈 때는
장터를 벗어나면 천당 뒷켠인 듯
황홀한 노을자리와
바람자락에 문지르는
두 쪽 내 염통과
단순하게 단순하게
살아 있는 누이 집을 가듯이
단순하게


헛전헛전 이 세상을
걸어가고 싶어라



*시집, 빈 들판, 나무생각








양양(襄陽)에 오는 비 - 이제하



복(卜)집 납작한 잿빛 지붕 위로
나치의 그것같은 만자(卍字) 깃발이
축 늘어져 있다
도랑으론 흙탕물 콸칼 쏟아져 내리고


뚝 너머 빠끔히 보이는
주막집 방에는
한 사나이가 삼성재벌 빌딩만한
엉덩이의 계집에 깔려 누워
붉은 그 손톱을 핥아주고 있다


영혼이니 뭐니
그 따위 소리 믿어본 적이 없다


포대기를 들치면 아이가 울고
아이를 묻으면 금(金)
금을 빨면 철(鐵)이 남는 거지


그 다음은 완벽한 먼지
키대로 실려가는 완벽한 먼지


하지만 이렇게 오도가도 못하고
비 쏟아지는 날
흙탕 속에 귀기울이고 있으면


핏속을 무슨 다른 것이
울고가는 기척이
들리기는 한다






# 이제하 시인은 1937년 경남 밀양 출생으로 마산고를 거쳐 홍익대 조소과에서 수학했다. 1957년 <현대문학>에 시가 추천 되고, 1961년 한국일보 신춘문예에 소설 <손>이 입선 되어 문단에 나왔다. 이후 시, 소설, 평론 등 장르의 경계선을 넘나드는 다방면에 걸친 작품 활동을 통해 우리 시대에 보기 드문 르네상스식 예술가의 면모를 보여왔다. 1985년 <나그네는 길에서도 쉬지 않는다>로 이상문학상을, 1987년 <열망>으로 한국일보문학상을 수상했다. 시집으로 <저 어둠속 등빛들을 느끼듯이>, <빈 들판>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