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밤의 흉각에 깃든 입술 자국 - 한석호

마루안 2018. 12. 23. 18:48



밤의 흉각에 깃든 입술 자국 - 한석호



어떤 날은 잠들고
어떤 날은 깨어 있다
녹슨 파도 소리를 수선하느라
혈관이 뚜렷해진 달의 규방
꽃을 꺾는 일은
그림자를 잃어버린 자의 밤을 수혈하는 것보다 비리다


그림자극을 상영하는 극장 앞에서
그림자를 동반하지 않는 자의 배후를 오래 읽은 적 있다
무대 뒤에는 비망록도 없이
사라진 것들의 비명을 찾는 따뜻하고 안쓰러운 궁구가 있다


끝내 아무것도 읽지 못하고 돌아와
문을 여는 밤의 흉곽에 깃든 입술은
신시사이저로 읽을 수 있는 음역대가 아니다
낡은 기타 줄 위에서
마음의 내륙으로부터 흘러온 바다를 연주하고 싶다


태풍은 언제나 예측한 항로로 분화하지 않고
해안선이 부리고 간 붉은 사이렌 소리는
녹슨 뱃고동 하나를 등대 깊은 곳에 묻어 놓고 철썩인다
들여다보아선 안 될 밤의 치부를 열 때
하나의 문은 가만히 닫히고
하나의 문은 흐느끼듯 둥근 고리를 내어 준다


그대라는 생의 별서에 들어
어금니가 부서진 별 하나를 입에 밀어 넣고
푸른 입술로 지그시 깨물어 본다
어떤 날은 깨어 있고
어떤 날은 울음을 안고 잠들어 있다



*시집, 먼 바다로 흘러간 눈, 문학수첩








기억은 사육되지 않는다 - 한석호



밤은 지독히도 외로운 화면
어둠이 연노랑의 봄을 미장센하고 있다
꿩병아리를 쫓다 넘어진 무릎이 깨어나고
어딘가로 달아난 꽃들이 서로를 수소문한다
전 재산인 돼지 스무 마리가
모두 죽어 버린 그해
아비의 희망도 리어카에 실려 나갔다
그때 먹구름은 오래오래
내 청춘을 안개 속으로 끌고 다녔다
낮의 안경을 벗으니
관객은 가장 위험한 그림이 될 수 있음을 알게 되었다
기록으로 남은 건 아니지만
버지니아 울프는
고를 수 있다면 기억이 아니라 망각을 고르겠다고 했다
개들이 자신의 죽음을 예견하고
화면 여기저기에 오줌을 갈기고 다닌다
거리마다 무덤이 늘어나고
내 눈은 자주 허공의 해바라기를 움켜쥔다
인생은 짧고 예술은 길다는 문장을
심미주의자들에게 처방전으로 쥐여 주어야겠다
설야(雪夜)엔 처음 보는 음악을 입고
불가능을 가능으로 읽는 안경을 쓰는 것이 좋겠다
음악을 일찍 닫는 장면들은 위독하다
밤은 혁명을 꿈꾸기에 적합한
젊은 파르티잔들의 성지라고 기록한 적이 있다





# 한석호 시인은 1958년 경남 산청에서 태어나 경희사이버대 문예창작과를 졸업했다. 2007년 <문학사상> 신인상으로 등단했다. 시집으로 <이슬의 지문>, <먼 바다로 흘러간 눈>이 있다. 경찰서에서 근무하고 있다. 단정하고 군더더기 없는 시를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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