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소년이 울고 있다 - 김경윤

마루안 2018. 12. 23. 18:17



소년이 울고 있다 - 김경윤



안개처럼 아련한 기억의 저편에서
한 소년이 울고 있다


저문 바닷가 모래 언덕에서
소금기 젖은 칼칼한 갯바람에 머리칼을 날리며
청마(靑馬)를 읊조리던 소년의 어깨 너머로
바다는 우렁우렁 붉게 물들었다


아버지의 귀향은 늘 낙조보다 더디고
허기진 마음은 먼 하늘의 개밥바라기로 깜박일 뿐
갈매기 울음소리 어둠 속으로 가뭇없이 사라지고 말면
모래 가슴에 점점이 찍힌 새 발자국 따라
소년의 눈시울은 우련 풀잎처럼 밤이슬에 젖었다


풀가슴 태우던 그 길고 긴 바닷가
싸락싸락한 모래바람 속에서
어물전에 나간 엄매는 어디쯤 올까
눈물의 곡조를 소리 없는 음표로 새기며
소년은 가슴속에 말의 집을 지었다


지금도 그 유년의 바닷가에 서면
별빛처럼 희미한 기억의 저편에서
한 소년이 파도 소리로 울고 있다



*시집, 바람의 사원, 문학들








귓불이 붉은 저녁이 있었다 - 김경윤



풀 먹은 문풍지가 하늬바람에 울었다
단풍잎이 새겨진 창호에 싸락눈이 치는 저녁이었다
아버지는 먼 바다로 꽃게잡이 떠났다고 했다
양은솥엔 새알팥죽이 끓고 엿내기 화투 치는 쳐녀들
안방으로 모여든 동짓날이었다
먼 들판엔 말발굽 소리
뒤뜰 감나무 가지엔 말 울음소리 들렸다
동네 처녀들 몇 밤늦도록
호박엿 내기 화투를 치는 그 밤,
군용 담요가 깔린 아랫목에는 매화가 피고 단풍이 물들었다
처녀들의 웃음 사이로 간간히 흐르는 연애담엔
호박엿처럼 달자근한 침이 고였다
어머니의 솜이불 속에서 알을 품은 새처럼 잠든 나는
끝내 탱탱해진 아랫도리를 참지 못했다
새알팥죽 같은 불알을 붙들고 뒤란으로 달리는 등 뒤에선
깔깔거리는 처녀들의 웃음소리가 홍시처럼 창호에 번졌다
불이 붙은 듯 귓불이 발갛게 익은 밤이었다
살얼음 낀 오줌 항아리에 갈지자를 새기며
바라본 빈 하늘엔 누가 버리고 간
은빛 머리핀 하나 오롯이 빛나고 있었다
동지팥죽 한 그릇에 나이 한 살 더 먹고
귓불이 붉어지는 저녁이 있었다






# 김경윤 시인은 1957년 전남 해남 출생으로 전남대 국문과를 졸업했다. 1989년 무크지 <민족현실과 문학운동>에 작품을 발표하며 등단했다. 시집으로 <아름다운 사람의 마을에서 살고 싶다>, <신발의 행자>, <바람의 사원>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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