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머나먼 술집 - 류근

마루안 2018. 12. 23. 18:08

 

 

머나먼 술집 - 류근


요 몇 달 사이에 나는 피해서 돌아가야 할
술집이 또 두 군데 더 늘었다
없던 술버릇이 하나씩 늘어날 때마다
갈 수 없는 술집들도 하나씩 늘어난다
그저께는 친하게 지내오던 사채업자와 싸우고
어젯밤엔 학원 강사 하는 시인과 싸우고
오늘은 술병 때문에 일요일 하루를
낑낑 앓는 일에 다 바친다
억울하다 갈 수 없는 술집이 늘어날 때마다
없던 술버릇이 늘어날 때마다
그래도 다시 화해해야 할 사람들이 늘어날 때마다
나는 또 술 생각이 난다 맨 정신일 때
저항하지 못하는 것은 내 선량한 자존심
하지만 그들은 왜 하필 술 마실 때에만
인생을 가르치려는 것인가 술자리에서만
별안간 인생이 생각나는 것인가
억울하다 술 마실 때에만 불쑥 자라나는 인생이여
술에서 풀려나면 다시 모른 체 껴안고 살아버려야 할
적이여 술집이여 그 모든 안팎의 상처들이여
갈 수 없는 술집이 늘어날 때마다
나는 또 술 생각이 난다 슬슬
피해서 돌아가고 싶어진다


*시집, 상처적 체질, 문학과지성


 

 



계급의 발견 - 류근


술이 있을 때 견디지 못하고
잽싸게 마시는 놈들은 평민이다
잽싸게 취해서
기어코 속내를 들켜버리는 놈들은 천민이다
술자리가 끝날 때까지
술 한 잔을 다 비워내지 않는 놈들은
지극한 상전이거나 노예다
맘 놓고 마시고도 취하지 않는 놈들은
권력자다

한 놈은 반드시 사회를 보고
한두 놈은 반드시 연설을 하고
한두 놈은 반드시 무게를 잡고
한두 놈은 반드시 무게를 잰다

한두 놈은 어디에도 끼어들지 못한다
슬슬 곁눈질로 겉돌다가 마침내
하필이면 천민과 시비를 붙는 일로
권력자의 눈 밖에 나는 비극을 초래한다
어디에나 부적응자는 있는 법이다
한두 놈은 군림하려 한다
술이 그에게 맹견 같은 용기를 부여했으니
말할 때마다 컹컹, 짖는 소리가 난다

끝까지 앉아 있는 놈들은 평민이다
누워 있거나 멀찍이 서성거리는 놈들은 천민이다
먼저 사라지는 놈들은 지극한 상전이거나 노예다
처음부터 있지도 않았고 가지도 않은 놈은
권력자다
그가 다 지켜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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