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 - 장정일
저녁에,
교태도 눈물도 없이 타오르는 들녘을 따라간다
세상에서 가장 신중하게 생각하는 저울처럼
요요히 타오르는 저 들불,
마음의 평화를 배꼽 밑에 모으고
주린 입술 하나로 대지 위에 엉겨붙은
잔디 타는 불!
타들어가며,
밀양(密陽)은 자꾸 무슨 얘긴 듯 걸어오지 않았나
처음엔 알아듣지 못하였지만
뒤돌아보니
아는 형제들과 마을의 불빛이 보이지 않고
개 짖는 소리조차 여기서는
들리지 않을 것 같다.
그러면 외쳐볼 것을
너무 멀리 오기 전에,
타는 들이 전하는 세계의 비밀을
어린 조카까지 들려줄 것을!
삶은 들판 하나를 가로지르는 것
영겁이 다시 와도
이 길은 돌아오지 않는다.
*시선집, 라디오같이 사랑를 끄고 켤 수 있다면, 책읽는섬
구인 - 장정일
그 집 앞 지날 때마다 궁금히 여겼던
주근깨 얼굴의 여자는 모습을 드러냈네
나 항상 그 지하도 작은 서점 지날 때마다
'여점원 구함'이라는 구인광고를 보고서
낯모르는 그 여인을 상상하곤 했었네
그런데 너 주근깨 얼굴의 여자여
드디어 너는 너의 자태를 드러냈구나
막 여고를 졸업한 듯 구김살 없는 얼굴
바싹 자른 단발, 검은 살양말이 눈썹처럼 가냘픈
너 주근깨 얼굴의 여자여
25억 여인들 중에 누굴까 하고
그 집 앞 지날 때마다 신비롭게 여겼던
드디어 너는 너의 정체를 드러냈구나
숱한 행인의 발걸음에 등을 밀리며 나는
아주 짧은 순간만 너를 곁눈질해볼 수 있었구나
매장에 붙은 서가에 기대어
달콤하고 꿈 많던 학창시절을 되새기는 듯한
슬픈 얼굴의 소녀여.
*시인의 말을 대신하여 - 장정일
시집을 읽어도 좋은 세 종류의 사람들에 대해 적어놓기로 한다.
시를 쓰고 있는 현역 시인들은 시집을 읽어야 한다.
당연히 그들의 연구자들도 시집을 읽어야 한다.
앞으로 시를 쓰려는 사람들도 시집을 읽어야 한다.
그 외의 사람들은 시집 같은 걸 읽을 필요가 없다.
시인이란 뭔가? 시인이란 시를 쓰기 위해 젊어서부터 무작정 시집을 읽기 시작한 사람들 가운데 생겨났으며, 시인이 된 뒤에도 시인이 되기 전과 똑같은 열정으로 시집을 읽어대는 사람이다.
스님이 그냥 스님이듯 시인은 그냥 시인이다. 제 좋아서 하는 일이니 굳이 존경할 필요도 없고 귀하게 여길 필요도 없다. 그 가운데 어떤 이들은 시나 모국어의 순교자가 아니라, 단지 인생을 잘못 산 인간들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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