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동나무 집 한 채 - 이종형
평생 가난해서였다는데
꼭 그런 이유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넓은 어깨, 무늬 좋은 나이테가 촘촘한
육신을 지니고도
정작 당신을 위해선 앉은뱅이책상 하나 장만하지 않았던 사내
목청 올리지 않고 산 세월을 남기고
끝내 돌아선 밤
곡(哭) 없는 새벽 3시의 영안실엔 아직
촛불조차 켜지지 않았는데
단단했던 근육을 스스로 허물고
깊은 잠에 빠진 당신을 위한
마지막 선물
단 한 번도 가져보지 못했을
마지막 거처
오동나무 집 한 채 고르는 밤
*시집, 꽃보다 먼저 다녀간 이름들, 삶창
바나나 혁명 - 이종형
촛불집회를 마치고 돌아오는 밤늦은 귀갓길
담배를 사기 위해 들른 단골 편의점 계산대 앞에서
코트 주머니에 둘둘 말린 종이 피켓을 보더니
스물을 갓 넘겼을 야간근무 청년이 알 듯 말 듯 미소를 보낸다
시청 앞에 다녀오시나 봐요
아, 저도 꼭 참석하고 싶었는데 너무 아쉬워요
돌아오는 주말엔 꼭 참석할 생각이에요
잠깐만요, 선생님 이거 하나 드세요
제가 사서 드리고 싶어요
시급이 육천 원 남짓할 아르바이트 청년이
어쩌다 한 번씩 추억의 맛을 찾던 나를 기억하고
노란 바나나우유에 빨대까지 꽂아 쥐어준다
몇 번 마다한 내 손에 건네진 노란 우유 한 모금에
술이 확 깨어오는데
엉겁결에 건네받은 고단한 노동 앞에서
부끄럽고 고마웠던 밤
뜨거웠던 초겨울 그 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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