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문 닫은 상점의 우울 - 이설야

마루안 2018. 12. 15. 21:22



문 닫은 상점의 우울 - 이설야



나는 집 나간 고양이
문 닫은 상점의 우울을 즐기는
나는 뚱뚱한 개 새끼
아무거나 처먹고 검게 탄 인형을 토하는


내가 낳은 그림자를 뭉개며 막차를 쫓는
나는 깜깜한 아버지의 온도
가질 수 없는 사랑만 골라 하지


나는 네 발로 뒤로 걷는 수수께끼
두 발로 거짓말을 즐기는
맑은 날은 깨금발로 금을 밟아
두꺼운 질서를 비웃곤 하지


나는 아무것도 포개고 싶지 않은 낮달
오래된 시계가 버린 그늘
잠자리 눈으로 뒤통수만 바라보는
새끼 고양이들을 자꾸만 죽이는



*시집, 우리는 좀더 어두워지기로 했네, 창비








공가(空家) - 이설야



함부로 꽃이 피고 있었다


낡은 철문에 붉은 글씨,
공가(空家)


버리고 간 집들이 도시를 이룬
가정오거리 재개발지구 루원씨티


어서오십시오 장터할인마트 팻말에도
위험 접근 금지 써 붙인 낚시집 썬팅에도
목련왕대포집과 정아호프 부서진 문에도
책임중개 새시대부동산 건물에도, 있었다
꽃나라유치원 구름다리 앞
개나리 이마 으깨어진 노란 줄이 쳐졌다


안전망에 갇힌 빌딩
깨진 유리창 안에서 굶주린 개들이 서로를 물어뜯고
비전축복교회 뒷마당에서는 부러진 의자가 못을 버렸다
드림빌라 사람들 모두 사라졌는데


붉은 글씨. 전체공가(全體空家)


방범초소도 불을 끄고 웅크린 채 벌벌 떨고 있는데
뾰족구두가 허물어진 집을 찾아 다급하게 걸어간다
담쟁이들 손 꼭 잡고
녹슨 첨탑 십자가 위로
올라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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