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승의 필요성 - 김상출
저승은 있어야 한다
나는 죽어 저승에 꼭 가야 한다
빌고 싶어도 빌 수 없게
먼저 세상을 떠버린 사람들에게
빌어야 할 일이 많기 때문이다
내가 아는 나의 죄와
내가 미처 모르는 나의 죄
내가 아는 나의 선행과
내가 미처 몰랐던 선행도
저승에서 말끔하게 판정받고 싶다
저승은 꼭 있어야 한다
이승에서는 내게 힘이 없어
어쩌지 못하는 나쁜 놈들이
저지른 죄만큼 벌을 받아야 하는데
벌 줄 곳이 거기뿐이기 때문이다
그들이 알고 저지른 죄와
저질러 놓고도 모르는 죄
그 죄로 인해 울어야 했던 사람들의
슬픔과 분노와 좌절과 아픔들이
그놈들의 가슴에 그대로 들이치는 꼴을
꼭 내 눈으로 확인해야 하기 때문이다
*시집, 부끄러운 밑천, 문예미학사
식탐 - 김상출
내 유년은 보릿가루 죽으로 살아냈다
바싹 말린 생보리를 맷돌에 들들 갈아
가루도 알갱이도 아닌 크기로 바스라지면
거기에 물만 붓고 그냥 끓인 죽
우리 집 경제만큼이나 찰기가 없어
숟가락에 퍼서 기울이면 주르륵 흘러내리던
멀건 회백색 점액질의 가난
식구 수대로 퍼 담은 일곱 개의 죽 그릇과
한복판에 놓은 조선간장 한 종지가
(간장 종지가 희고 작아서 늘 슬퍼보였다)
우리들 밥상의 전부였다
거칠고 아무 맛도 없는 그것을
사람들은 깔깔하다고 했는데
나는 아버지가 무서워 잘도 먹었다
아니 나를 가여워하실 어머니 때문에
그냥 목구멍 안으로 넘겨내고 있었는데
넘긴 후에도 큰 부스러기들은 남아
혓바닥 위를 모래알처럼 마구 굴러다녔다
육십이 지난 지금까지도
결코 줄어들 줄 모르는 나의 식탐은
그때부터 시작되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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