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자정의 막다른 골목 - 주종환

마루안 2018. 12. 12. 23:19



자정의 막다른 골목 - 주종환



어서 오세요, 그리고
미세요.


다람쥐 쳇바퀴 같은 생활, 자정이 넘어서도
잠이 오지 않는 당신


셔터가 내려진 거리엔
집 나온 처녀 같은 행색 하나가
휴대폰을 만지작거리며 맨땅에 앉아있고


어서 오세요, 그리고 미세요


이곳은 당신에게 아무것도 팔 것이 없는
실내올시다
무엇을 사시려고요?


앉아도 됩니까?
살 것이 있어서 왔는데
당신은 팔 것이 없다


난 이미 세상이 아닌 물속에 젖은 책 속으로 들어왔고,
그대는 책 밖에서 책을 구매하지 않소


백치와 책벌레가 한 테이블에서 술을 마시는 격이오
우린 서로의 흠집을 냄으로써, 생존 가능한 거울인가?


여러 번의 겨울이 지나는 동안,
남자의 품이 그리운 어린 처녀와
술값만 있으면 겨울을 나는 어느 시인은
영영 서로에게 무관심하다는 걸 알았소


어린 처녀가 꿈꾸는 것은 사랑의 보금자리,
시인이 꿈꾸는 건 원치 않는 장소에서
객사하지 않는 거요

 

당신은 아직 술과 고기 탄 냄새가 밴 헌책을 버리지 못한 거요
그리고 천신만고 끝에 얻은 새 책들을
부러진 상다리 대신에 깔고 있소


유성우가 지나던 밤에 당신은 무얼 하고 있었소?
이 세상 그 누구도 당신을 찾지 않는 세월 속에
그대가 발견한 새 책의 첫 페이지가 있었소
자신이 서명할 수가 없는 자서전이었소


세상의 모든 유성은 바로 그러한 책 속으로 떨어지오
세상은 전대미문의 하룻밤을 남긴 허송세월이라오


재색(財色), 그리고 정(情)
만인의 심금을 울린 이야기


어서 오세요, 그리고 미세요
우리가 파는 것이 바로 그거랍니다



*시집, 계곡의 발견, 지헤출판사








초승달 아래 영하 4도 - 주종환



김 오르는 국밥집에서
소주잔을 기울이며
TV를 곁눈질 하던 중년의 남자들이 있었다


김 오르는 국밥집에서
소주잔을 기울이기보다는
사랑하는 사람과의 긴 하룻밤을
애타게 구하던 젊은이들이 있었다


가로등 불빛을 스치는 눈발,
도심의 가파른 골목길들, 겨울은 길고
고기 집을 들르지 않고 찾을 수 있는 애인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