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눈물 머금은 신이 우리를 바라보신다 - 이진명

마루안 2018. 12. 11. 20:03

 

 

눈물 머금은 신이 우리를 바라보신다 - 이진명


김노인은 64세, 중풍으로 누워 수년째 산소호흡기로 연명한다
아내 박씨 62세, 방 하나 얻어 수년째 남편 병수발한다
문밖에 배달 우유가 쌓인 걸 이상히 여긴 이웃이 방문을 열어본다
아내 박씨는 밥숟가락을 입에 문 채 죽어 있고,
김노인은 눈물을 머금은 채 아내 쪽을 바라보고 있다
구급차가 와서 두 노인을 실어간다
음식물에 기도가 막혀 질식사하는 광경을 목격하면서도
거동 못해 아내를 구하지 못한,
김노인은 병원으로 실려가는 도중 숨을 거둔다

아침신문이 턱하니 식탁에 뱉어버리고 싶은
지독한 죽음의 참상을 차렸다
나는 꼼짝없이 앉아 꾸역꾸역 그걸 씹어야 했다
씹다가 군소리도 싫어
썩어문드러질 숟가락 던지고 대단스러울 내일의
천국 내일의 어느날인가로 알아서 끌려갔다
알아서 끌려가
병자의 무거운 몸을 이리저리 들어 추슬러놓고
늦은 밥술을 떴다 밥술을 뜨다 기도가 막히고
밥숟가락이 입에 물린 채 죽어가는데
그런 나를 눈물 머금고 바라만 보는 그 누가
거동 못하는 그 누가

아, 눈물 머금은 신(神)이 나를, 우리를 바라보신다

 

 

*시집, 세워진 사람, 창비

 

 

 

 

 

 

바위 - 이진명

-숨은벽

 

 

우리는 죽는다

죽으면 죽음이란 없다

죽음은 거기에 있지 않고

여기에 있는 것

 

인수봉과 백운대 사이

숨은벽이 있다

인수와 백운 사이

겨울 숨은벽

 

숨은벽 오른다

숨어서도 높다 가파르다

저 아래 깊은 검은 골짜기

사지가 사방으로 흩어져 뻗은

나의 동체가 보인다

그 동체 일어나 사지를 수습하고

하, 입김을 불고

겨울 숨은벽 다시 기어오른다

죽음이 숨은벽을 오른다

이번엔 오르던 내가 교대해

저 아래 검은 골짜기로 아아악 미끄러진다

사지를 사방에 널고 동체를 안착시킨다

깍깍 환희하는 검은 까마귀떼

완료!

이상 무!

 

죽음은 거기에 있지 않고

여기에 있다

인수와 백운 사이

숨은벽을 끼고

평온히

우리는 산다

 

 

 

 

# 이진명 시인은 1955년 서울 출생으로 서울예대 문예창작과를 졸업했다. 1990년 <작가세계>로 등단했다. 시집으로 <밤에 용서라는 말을 들었다>, <집에 돌아갈 날짜를 세어보다>, <단 한 사람>, <세워진 사람>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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