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찔레꽃이 저문다 - 정우영

마루안 2018. 12. 12. 23:36

 

 

찔레꽃이 저문다 - 정우영

 

 

저 건너에서 한 사람 불러내라고 하면

누굴 꼽아야 할까.

어머니나 아버지? 아니면 할머니?

하지만 오늘밤 나는 불경스럽게도

저 곽산 떠도는 소월을 모셔와서는,

새로 나온 정미조의 개여울이나

실실, 함께 따라 부르고 싶다.

그런 다음에는 뭘 할 거냐고?

글쎄, 무슨 거창한 계획은 없다.

그냥 가만히 그이의 손바닥을 쓰다듬으며

그의 목숨에 찰랑거리는 물음들,

들여다보는 것만으로도 족하지 않을까.

 

그런 밤이다.

찔레꽃이 와락 찾아와서는

한참을 숨죽여 흐느끼다 돌아갔다.

 

 

*시집, 활에 기대다, 반걸음

 

 

 

 

 

 

까막눈 - 정우영

 

 

마흔아홉에서 쉰으로 넘어가야 하는

곡절 앞에 너는 서 있다.

한끝은 끝이 아니면서도 다시 끝이다.

더 이상 읽을 수 있는 책력이 없다.

이 쓰디쓴 긴장 속에서

너는 곧 얕은 잠에 빠질 것이고

눈발은 스멀스멀 기어 나올 것이다.

그러고는 은밀하고도 팽팽하게

난분분, 난분분 혼미의 교접을

철없이 문지르고 또 문지를 것이다.

뒤미처 아픈 살과 뼈를 감춰두고

차가운 경계 은근슬쩍 넘을까.

가고 가도 오고, 오고 와도 가는

섣달그믐 차갑고 어지러운 횡포들,

공허를 채우면서 너는 허공이 된다.

어느새 하늘이 싸락눈으로 까맣다.

정읍 양반도 이렇게 까막까막 쉰을 넘겼을 것이다.

 

 

 

 

# 정우영 시인은 1960년 전북 임실 출생으로 숭실대 국문과를 졸업했다. 1989년 <민중시>로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시집으로 <마른 것들은 제 속으로 젖는다>, <집이 떠나갔다>, <살구꽃 그림자>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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