싸움에서 잊힌 자 - 김광섭
나는 난파한다
목 없는 고아를 안고
욕지거리 퍼붓는 비바람도 머리 조아리며 배웅하겠지
절벽에서 한 걸음 물러서
한 뼘 손끝에 묻힌 낙원을 더듬으면
어느 길도 내 손안에 있지 않았으니
앵무새들과 빛을 나누어 먹으며
빈손 위에 끊어진 길을 쥔다
나는 나를 감추기 위해 얼마나 빠른 속력을 냈던가
완주를 위해 육체를 단련해야 했다면
유예에 성공해야 했다
내가 용허한 것은 순간의 혐오
외투 속에 바쁘게 움직이는 근육을 감추고 질주했다
내가 어떻게 살아남았는지 살아 있는 비애를 알게 되는
여운은 남겨 두지 말게
부끄러움의 역사는 다시 써야 하며
한가로운 날의 날씨는 불쾌하더라
내가 없는 영원에서 나는
질병으로 떠돌았다
*시집, 내일이 있어 우리는 슬프다, 파란출판
피살자 - 김광섭
옷깃 세우며 그림자를 첨탑까지 기울이던 너
너는 왜 돌아서 부활을 얘기했는지
달에서 눈을 떼지 못한 채 타이를 붉게 죄어 맸는지
떠남을 약속할 때 너는
발목을 물가 깊숙이 담그고 있었다.
두 팔을 벌려 본다
손과 손이 닿기까지 얼마나 멀어질 수 있는지.
세 번의 부정을 허락한 뒤
한 번의 우수를 믿게 한 아침과
일순간 절정에 다다르는 해일
너는 왜 장관이라고 하였는가
열린 바다가 닫히듯.
두려워하지 않아도 좋아 악몽은 꿈속에 머무는 것
일몰 때마다 거울에 비춰 보는 석양과
은과 금의 열쇠
네가 내 눈을 감겨 주는 것은 달이 완전해지는 기도
나의 눈꺼풀이 너의 넋을 삼킨다.
낯선 일도 아니었어
기적 한번 울리면 빨려 드는 긴 꼬리를 보게나
부인할 것은 아무것도 없어
얼음 한 조각 입에서 녹으면 그뿐.
달이
뒤돌아보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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