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색의 이면 - 임봄
길들여지기를 거부한 늑대,
너는 몽골에 두고 온 바람천막이다
야생의 독을 감추고
굶어 죽은 전갈의 전생이다
먼 곳의 말발굽 소리를 기억하는 등불
새로 걸어둔 밧줄은 하루의 길이만큼 닳았다
훈장으로 새겨진 상처를 헤집고
전사들이 은빛 달 비린내를 몰고 온다
소금호수에서 걸어오는 낙타
속눈썹이 열리고 닫히는 사이에 자라던
무중력의 시간들
등 뒤를 따라오던 공백들은 한 번도
온순하게 불을 피운 적이 없다
나는 정작 아무것도 보지 못하고
박하냄새 나는 눈길을 맨발로 걷는다
길게 자란 송곳니가 덥석 목덜미를 물자
숲이 점점 멀어지고 있다
*시집, 백색어사전, 장롱
黑-7/ 임봄
한때 살아 숨 쉬던 것들의 장례식이
날마다 다른 방식으로 치러진다
음식이라는 꼬리표를 달고
냉장 혹은 냉동되었던 식탁 위의 생들,
죽음이 또 다른 삶을 연명하듯
어제의 허기들을 기억한다
함께였던 어제와 혼자 살아남는 오늘
아직 늑골 한 구석에 숨어 눈을 번득이는
탐욕스런 또 다른 허기들에 대하여
나는 과거를 살고 싶지 않아
갓 태어난 신선한 상추의 죽음을 음미하고
새로 만든 무덤에 핀 흰 도라지꽃을
식탁 위에 꽂아놓고 싶을 뿐이야
살아남는다는 것은
미처 채우지 못한 산 자의 허기를 위해
또 다른 살인을 모색하는 일
몇 장의 돈과 바꾸어온 죽음을
밥 먹듯 하는 오늘은
또 얼마나 많은 죽음과 타협하여야 하나
맷돌 같은 어금니로 죽음을 씹으면서
이 식탁에서 저 식탁으로 나아가고 있는
우리는,
# 임봄 시인은 (본명 임효선) 1970년 경기도 평택 출생으로 고려대 대학원 문예창작과 박사과정을 졸업했다. 2009년 <애지>로 시 등단, 2013년 <시와사상>에 평론으로 등단했다. 시집으로 <백색어사전>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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