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참회록 그후 - 허연

마루안 2018. 11. 3. 21:38



참회록 그후 - 허연



신을 만났다는 너와 갈빗살을 먹는다. 음식은 사람을 덧없게 만드는 재주가 있지. 죽은 고기와 죽은 잎들. 세월의 이름으로 몰락을 먹는 저녁.


그리움이 남았다고 했다. 경건해지고 싶지만 세월은 여전히 밉다고 했다. 생을 주고 얻은 것은 종유석처럼 자라나는 그리움뿐이라고. 하숙집이 있던 언덕에서 너는 멜로영화처럼 웃었다. 남은 건 없다. 네가 교생실습을 나가던 그 골목엔 죄 많은 우리가 그날의 눈처럼 밝히고 있었다.


월곡동이여. 조급한 세월 앞에서 떠다녔던 은지화여. 토탄(土炭) 속에 들어가 약하고 질긴 불꽃으로 천천히 타버린 날들이여.
우리는 빗나가 있었으므로
삶이 아닌 것들이 우리를 도왔고
삶은 아득해지기만 했었다.


이번 정류장이 아니었다는 듯이
막차 불빛은 힘없이 멀어졌다.
참을 수 없이 분했다.



*허연 시집, 오십 미터, 문학과지성








외전 2 - 허연



무엇이든 딱 잘라서 말하는 게
갈수록 어려워진다
일 없는 늦은 저녁
설렁탕 한 그릇 함께 먹을 사람조차
마땅치 않을 때
사는 건 자주 서늘하다


나이 들어 하는 사랑은
자꾸만 천한 일이 되고
암수술하고 누워 있는 동창에게서
몇 장 남지 않은 잡지의
후기가 읽힐 때
생은 포자만큼이나 가볍다


수십 년 전 방공호 속에서
초현실주의 시를 읽었던 선배들은
이렇게 가볍지는 않았을까
바흐를 들으며
페노바르비탈을 먹었다는 그들은
지리멸렬한 한 세기를 사랑했을까


나는 아직도 생에 대해서 알지 못한다
상처에 대해서 알 뿐
안부를 물어줄 그 무엇도 만들어 놓지 못했다


대폭발이 있었다던 오래전 그날 이후
적의로 가득 찬 광장에서
생이여, 넌 어떻게 견뎌왔는지
기찻길에서 풀풀 날리던 사랑들은
얼마나 많이 환생하고 있는지


생각이 아프면 내가 아프다
생이여!





*시인의 말


난 알고 있었던 것이다.
생은 그저 가끔씩 끔직하고,
아주 자주 평범하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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