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일홍 - 심재휘
병원에서 준 소염제를 열흘 먹었더니
깊은 잠을 자는 며칠이 있었다
어딘가의 염증과 부스럼을 이제는 내 몸이 아니라고
말할 수 없도록 창문에 비가 스미는 하오
사람들은 내 얼굴이 좋아졌다고 했다
내 것과 내 것이 아닌 얼굴이 서로를 다독거리고
늘어진 옷에 몸을 함께 들이민 가을과 저녁이
서로를 어루만진다
창밖의 백일홍은 겨드랑이마다 새 가지를 밀어내
여름 내내 꽃을 피웠는데도
지지도 못하고 마르며
여태 피어 비를 맞고 있다
석 달 열흘은 옹이 몇 개쯤 지닐 만한 순간
그리고 다가올 폭설의 날들은
내다볼 멀리도 없이 제 몸을 핥는 꽃에게서
차례 없이 시든 잎들에게서
용서를 배울 만한 시간
*시집, 용서를 배울 만한 시간, 문학동네
추억에 기댄 저녁 - 심재휘
지하철이 지하를 막 빠져나와 한강 다리를 건너려 할 때 추억에 기댄 저녁 하나가 있고 해는 하류 쪽으로 진다 물위에서 덜컹덜컹 흔들리는 몸 그리하여 나는 다리를 건너는 동안 어쩔 수 없이 추억염을 앓았다고나 할까
굳기 전에 서둘러 흐르는 강물의 표정을 뼈아프게 받아 적어야 하는 몸들 지금은 달리는 것처럼 보이도록 만들어진 기차 속에서의 몸이 우주의 유일한 순간이어서 식도에 고여 있던 가래 같은 것을 뱉지도 삼키지도 못하고 그냥 추억염을 앓았다고나 할까
추억염 증세란 물수제비뜨듯 물위를 달리다가 곧 가라앉을 저녁의 파문 같은 것 다시 땅속으로 곤두박질치려는 몸에 가까스로 닿은 박모를 만지며 사라진 빛들은 지금 그곳에 있느냐고 차마 묻지 못하는 눈빛 같은 것
나의 추억염은 유일한 불치병이라 세상에는 나의 몸이 일러주는 이 순간과 늘 그리운 그대만이 있어서 어쩔 수 없이 추억염을 앓았다고나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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