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흘러간다는 것은 - 이광복

마루안 2018. 10. 25. 23:02



흘러간다는 것은 - 이광복



해와 달과 별이
바람과 구름이
나무 사이로 흐르는 동안
나무는 제 몸을 하늘로 조금씩 흘려보내고
꽃과 잎은 나뭇가지 위로 흘러가고
몇 마리의 새가 허공을 맨발로 흘러간다


흘러간다는 것은
살아있음을 기억하기 위한 몸부림


양지바른 골목 어귀
귀가 흐름을 멈추려 하는지
중얼중얼 말을 걸어보는 할머니
폐지 가득 실은 유모차 뒤를 따라 흘러가고
오수에 졸린 골목을 기웃대던 햇살이
느릿느릿 할머니 등을 떠밀며 흘러가는 오후


아스팔트 위 고양이 한 마리
흐름을 멈춘 채 무슨 생각에 그리 골똘한지
세상에서 가장 낮은 자세로 몸을 낮추고 고요하다
저 낮은 고요의 깊이에는
오래전에 흐름을 멈춘 아버지
아직도 내 눈물을 마시며 발효하고 계시다



*시집, 발이 버린 신, 문학의전당








가랑잎 - 이광복



오랜 투병으로 병상에 누워계신 아버지
늦가을 가지에 매달린 채
바람 앞에 파르르 떨고 있는 가랑잎 같다
앙상한 손등
툭툭 불거진 잎맥 같은 혈관에 꽂힌 링거바늘로
떠나려는 아버지를 붙잡고 있지만
곱게 단풍들지 못한 지난 생이
남은 생의 쓸쓸함을 발효시키는지, 때론
가랑가랑 끓어오르는 숨결에서 두엄 냄새가 난다


푸르렀던 생의 젖은 무게를 비워내느라
무겁게 닫혀 있는 눈꺼풀 사이에 고이던 눈물도
말라버려 가벼워진 몸
환자복을 갈아입힐 때마다
탄력을 잃은 피부가 손끝에서 부서질 듯 바스락거린다
비바람 앞에서도 당당하게
내게 기둥이고 언덕이 되어주었던 넓은 등
오그라들 듯 휘어지고
바람 한 줌도 버거워 보이는데


오랜 질곡의 시간 버텨온 가랑잎 하나
바람 앞에 힘없이 떨어진다
잎 진 자리가 퀭하니 허공이다
저 깊은 허공을 오래도록 들여다보며 한 생애의 추억을
가슴 한쪽에 접어 넣자 내 몸에서 허공이 자라났다


누군가의 울음소리가 숲을 빠져나가
허공으로 스며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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