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 또 가을 - 이홍섭
해송은 서 있고
바다는 길게 누워있습니다
해정한 귀신이 섰는지
뒤태가 다 들여다보이는 가을, 또 가을입니다
해송은 허리띠를 조이고
바다는 큰 고래 한 마리로 누워 힌 수염을 고릅니다
해당화 향기 코를 찌르던 시절이 가니
오리바위, 십리바위도 제 자리로 돌아갑니다
더도 덜도 없는 가을, 또 가을입니다
*시집, 검은 돌을 삼키다, 달아실
돌단풍 - 이홍섭
개울 개울마다 돌단풍이 지천으로 피어났다.
이파리만으로도 아름다운 청춘 같았다.
마을에 하나밖에 없는 다방에서는
애인이 연대병력쯤 된다는 아가씨가 울먹이는 귀대병의 어깨를 토닥였다.
돌단풍 한 잎이 첫서리를 맞고 있었다.
나는 어머니에게서 온 편지를 검열 당한 이후
아무에게도 편지하지 않았다, 날마다 돌단풍처럼 입이 굳어갔다.
얼마 뒤 귀대병 하나가 총구를 입에 물고
방아쇠를 당겼다, 너럭바위에서 돌단풍이 우수수 떨어져 내렸다.
그해에는 돌단풍이 지고 난 뒤 여러 날 눈이 내렸다.
하루 종일 눈을 치다 내무반으로 돌아오면 발톱이 하나씩 빠져나갔다.
밤이 오면 눈 속에서 바위를 찢는 돌단풍 소리가 들리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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