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머를 넘어가도 - 김점용
-꿈 70
한여름에 낯선 어촌에 갔다 바다가 있고 산을 넘으니그곳은 겨울이다 눈이 내리고 얼음이 얼어 있다 몹시 가파른 언덕길을 버스를 몰고 가다가 다 넘지 못하고 후진으로 내려오는데 친구가 그 너머가 진짜 절경이라고 말해준다 가볼까 가볼까 고민하다가 액셀러레이터를 거칠게 밟았다 바다가 보이고 몽정을 했다
오빠 잘해줄게 놀다 가아,
미끈한 다리를 보면
몸뿐인 동정(童貞)이 귀찮기만 했다
처럼 언제나 너머는 있었는데
너머를 넘어가도 너머였는데
그러니까 너머는 늘 이쪽에 있었는데
들끓는 몸과 마음
가볼까, 가봐도 없었잖아, 그래도 가봐야지
언제나 침묵으로 남아 있는 자리
조용히 무덤 하나 생기는 자리
너머는
*시집, 오늘 밤 잠들 곳이 마땅찮다, 문학과지성
공포는 - 김점용
-꿈 57
병원 침대에 아버지가 누워 있다 나는 병문안 중인데 좀 피곤하다 침대에 비스듬히 기대자 푸른 옷을 입은 간호원이 와서 내게 주사를 놓는다 환자는 내가 아니고 아버지라고 소리치려 해도 입에서 말이 만들어지지 않는다 나는 천천히 마비된다 간호원이 내 옷을 차례로 벗긴다 어떻게 해볼 도리가 없다
거세 불안이라고 말하자 그는,
살부(殺父)에 대한 소망 충족이라고 했다
살부?
한물간 거 아닐까
이젠 아버지도 아들도 없으므로
오로지 나, 뿐이라는 거
가끔
내 목에 면도칼 유혹을 느끼는 건
나, 조차도 진부해졌다는 거
그거 아닐까
공포는
# 김점용 시인은 1965년 경남 통영 출생으로 서울시립대 국문과와 동대학원을 졸업했다. 1997년 <문학과사회>에 시를 발표하며 등단했다. 시집으로 <오늘 밤 잠들 곳이 마땅찮다>, <메롱메롱 은주>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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