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주의 가을 시대 - 박노해
첫 서리가 내렸다
온 대지에 숙살(肅殺)의 기운 가득하다
하루아침에 찬란한 잎새를 떨구고
흰 서릿발 쓴 앙상항 초목들
나는 텅 빈 아침 숲에 서서
하얀 칼날을 몸을 떨며 바라본다
싸늘한 안개 속으로 태양이 떠오를 때
사과 밭으로 올라가는 나는
지금 두 다리 밑에 지구를 깔고
우주를 산책하고 있다
우주의 절기에서 가장 혁신적인 변화는
여름의 불火에서 가을의 금金으로의 변화
언덕 위의 사과나무들은
언 서릿발에 뒹구는 낙과들 위로
살아남은 것들만 붉게 울고 있다
가을은 익어가는 계절만이 아니다
갈라내고 솎아내는 엄정한 계절이다
아 가을이 온다
우주의 가을이 온다
쭉정이와 알갱이를 가려내는,
참과 거짓을 한 순간에 심판하는
우주의 가을 시대가 온다
*시집, 그러니 그대 사라지지 말아라, 느린걸음
탈주와 저항 - 박노해
일상은 거대한 중력만 같아
먹고 사는 건 끈질긴 굴레만 같아
삶은 어디로 탈주했을까
생활 바깥에 뭔가 내가 살아야 할
바람과 햇살과 떠돌이 별과
거기 내가 만나야만 할 누군가
울며 기다리고 있는 것만 같은
밤이 걸어올 때
하루하루 내 존재감이 사라져가고
달릴수록 내 영혼이 증발되어가고
탈출 같은 여행도 발작 같은 비판도
솟구친 만큼 딱딱한 시멘트 바닥에 떨어지고
일상의 속도와 불안과 두려움이
영혼을 잠식해 들어오는 아침이 등을 떠밀 때
이 시대 최후의 식민지는 일상인가
내가 살아야 할 삶은 어디에 있을까
미아처럼 어느 골목 끝에서 울고 있을까
검은 숲에서 반인반수로 떠돌고 있을까
끈질긴 생활의 힘으로
강력한 일상의 힘으로
나에게는 생존의 굴레를 뚫고 삶으로 진입할
치열한 탈주와 저항이 필요하다
끝내 별똥별처럼 추락할지라도
대기권을 뚫고서 별과 입맞춤한 죄로
지구로 떨어져 얼음 속의 꽃씨가 될지라도
나와 같은 한 걸음의 또 다른 내가 필요하다
지금 나에겐 축적이 아닌 혁명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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