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 말도 없는 추석날 - 김이하
윗목도 아랫목도 없는 방에
가족이라고 모여 저녁밥을 먹고
텔레비전만 멍하니 바라보며 말이 없다
일찍이 아버지를 여윈 어머니
늦도록 장가 못간 아들, 며느리 집 나간 아들
어미 없는 아이들, 아비 없는 아이들
할말이 없는 것도 아닌데
입이 없는 것도 아닌데
모두 말이 없이 길게 누워
심드렁하니 누웠다가 이내 잠들거나
방 밖에 멀리 보이는 달을 보거나
담배를 한 대 피워 물거나
텔레비전은 밤새 켜 있고
윗목도 아랫목도 없는 방에
이제는 아물었을 법한 상처들 한 가득 재워 놓고
그러고도 아무 말 없이 깨어나 차례를 받들고
항아같은 그리움으로도 오지 않은 사람
가서는 오지 않는 사람들을
먼 눈가에 그려보는 것인지
서둘러 밥을 먹고 자리를 뜬다
가족이라고 모여 놓고도 가족이 아닌 것처럼
조용히 길을 떠나는 것이다, 쓸쓸한 추석
어디에도 못 가고 잠긴 목소리로 전화를 받는 친구는
이런 게 왜 있느냐고, 왜 있었느냐고
*시집, <춘정, 火>, 바보새
갈대숲에는 아버지가 산다 - 김이하
열 살 때 떠난 아버지는
돌아오지 않았다
구릉들 논이 날아가고
서남징이 장구배미도 동구점 논배미도
아버지 뒤를 따라 나간 뒤로
다시는 우리의 양식을 대주지 못하고
아카시 그늘 아래 미꾸리못만 남아
서러운 시절을 나며
내가 중학교에 갈 때도
아버지는 소식 없었다
읍내에서 돌아오는 버스를 놓치고
어둑어둑한 이십 리 길 걸어오면
등 뒤에는 땀이 흥건한데
냇가의 갈대 위로 달은 높았다
헝클어진 머리, 해쓱한 얼굴
암으로 날마다 야위어 가던 아버지
어느새 갈대가 되어
그 밤길 지켜 주고 있었다
# 김이하 시인은 1959년 전북 진안 출생으로 1989년 <동양문학>으로 등단했다. 시집으로 <내 가슴에서 날아간 UFO>, <타박타박>, <춘정, 火>, <눈물에 금이 갔다>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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