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여름과 가을 사이 - 김남극

마루안 2018. 9. 22. 23:16



여름과 가을 사이 - 김남극



큰물이 난 뒤 잡은 고기는 마른 만큼 흙내가 없다


개울가 자갈밭 옥수수골 속으로 으슥한 바람 들락거리면
옥수수알들 이를 악물고 단단해졌다


한낮에만 잠깐 햇살이 닿는 비탈밭에선
어다까지 가려는지 콩알이 탁탁 멀리뛰기를 한다


불씨가 사그러든 잿더미에 묻어둔 햇감자가
껍질이 타지 않고 뜨겁게 깊게 익었다


마당가 꽃사과는 그믐달빛에도 붉다


문 열어놓고 별빛 속에서 똥을 누다
아무렇게나 신고 나온 해진 운동화 속
발가락 사이로 드는 찬바람에 턱을 떤다


꽈리 속을 나온 노래가 여운을 남기지 못한다



*시집, 하룻밤 돌배나무 아래서 잤다, 문학동네








상강 무렵 - 김남극



고개를 오를 때는 옴죽거리는 안개가 길가에 늘어서서
복사뼈께가 간질거렸다
고갯마루에 오르니 길이 확 열렸다
마구 치댄 걸레 같은 낙엽들이 배수로로 쫓겨나 오종종 모여
새벽에 내린 서리를 걷어내려
등짝을 햇살 쪽으로 굽혀 둘둘 말고 엎드렸다
고갯마루를 내려오니
배추와 알타리무가 백발이 창창한 노인들처럼 일렬로 줄을 맞춰 서서
산마루까지 온 겨울빛을 걷어내려 낑낑대며
박자 맞추어 가을을 오래도록 끌고 가고 있다
밭고랑에 남은 끌려간 가을 흔적이 서리에 덮여
그 굴곡만 남았다
길가 구절초 쑥부쟁이는 씩씩하게 여전히
종일 몇 안 되는 행인의 체온이라도 붙잡아 배를 덮었는지
뽀송뽀송한 꽃잎들이 탱탱하다


꽃 쑥쑥 구불구불 핀 길로 할머니 동네 잔치 보러 가는지
이마가 허리보다 낮아 삼배하는 보살처럼 길을 나섰다
오래된 옥양목빛 소매가 잠깐 반짝한다


해가 중천에 올랐다






# 자연에서 느끼는 계절의 변화를 아주 세밀하게 그렸다. 시인의 눈은 이래야 한다. 매미가 목이 쉬도록 울어대던 한여름 지나고 금방 아침 저녁으로 선선해지는 계절의 변화는 자연이 가장 민감하게 반응한다. 숨이 턱턱 막혔던 옥수수밭 고랑에도 서늘한 바람이 분다. 가을이더니 곧 겨울이 가을을 밀치며 고개를 내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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