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아버지는 나귀 타고 - 이서화

마루안 2018. 9. 21. 21:58



아버지는 나귀 타고 - 이서화



밭고랑에 넘어진 아버지

썩은 밑동에도 성한 뼈가 있다는 듯 갈비뼈가 부러지며 폐를 찔렀다

붉은 녹말 같은 호흡들이 뭉클뭉클 쏟아졌다


부러진 뼈의 날카로운 끝 같은 속내가 많았을까

탯줄처럼 늘어진 소변 줄을 따라

요의도 없이 흘러나오는 힘 풀린 한 사내일 뿐이다

유일하게 통하고 있는 길

어느 날의 짓무른 눈가를 지나온 듯 불그레한 즙이 흐른다

그만큼 당신을 쥐어짜며 살았으면 충분하다

나, 저 물길을 따라 주춤주춤 나왔다

붉은 울음으로 빛은 한 덩어리 꿈이었으나

몸에도 맘에도 수시로 열꽃이 돋는

당신이 나눠준 목숨의 흔적이다


물과 불을 넘나들던 아버지 얼굴에서

반쯤 지워지는 주름진 악보를 읽는다

농담처럼 덜그럭거리는 자갈밭 곁에서

살인 듯 뼈인 듯 흔들리는 음표를 따라 부른다

일그러지는 입술로 설명하지 마시라

가사도 음정도 장담할 수 없지만

이것은 당신에게 배운 노래가 틀림없다


아버지는 나귀 타고

아버지는 나귀 타고



*시집, 굴절을 읽다, 시로여는세상








얼굴들 - 이서화



나른한 햇살이 해바라기 씨를 빼먹고 있는 요양원 뜰, 마당을 지나 오른쪽 길은 묵은 텃밭을 향하고 왼쪽으론 작은 냇가로 휘어져 있다


내가 보고 있는 것은 듬성듬성 알이 빠진 해바라기다


길이 없는 노인들이 창문 너머로 물끄러미 밖을 내다본다 갈 곳이 저렇게 많은데 냉이며 쑥이 저렇게 지천인데 이 창문은 길이 없다


오늘보다 내일은 빈 껍질이 더 많아지겠지 앙상하게 말라서 표정이 없다 표정들은 모두 어디로 갔을까 언제 생겨서 언제 사라졌는지 자신의 표정을 모른다


표정마저 버리고 간 얼굴들, 어쩌다 보니 찾아오는 표정 하나를 반갑게 맞이하는 요양원 노인들, 해바라기들은 텅 비어가고 해를 외면한 채 검은 얼굴이다


기억의 먼 표정만 빼서 꺼내먹고 있는 얼굴들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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