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의 법칙 - 김하경
아버지는 상의 용사였다
6.25 참전 때 철원에서 한쪽 다리를 잃었다
댕강 떨어져나간 한쪽 다리
오남매 배는 늘 허전하게 채워졌고
의족 끼운 아버지 한쪽 엉덩이가 보름달처럼 부풀었다
왼쪽 발바닥이 평발인 나도
오른쪽 발바닥에 힘을 주며 길을 걷는다
물집이 생길 때마다
왼쪽 발은 땅 딛기가 거북하였다
평평했던 발바닥 굳은살은 튕겨 나오면서
뼛속에 숨은 삶의 걸음걸이도 뒤틀렸다
절뚝절뚝 뒤틀릴 때 오른쪽 엉덩이가 왼쪽으로 낮아진다
발 한번 담구지 못한 의족
아버지 다리를 닮은 강줄기 따라
피라미가 지나다니는 물길에 어머니와 나란히 뿌리셨다
막 목욕을 끝낸 딸아이 발처럼
신지 못한 하얀 신발 아래
보름달 밝음까지 낮아진 밤, 왼쪽 시간이 출렁출렁 흐른다
무덤 속 어둠보다 밝은 강 속
집으로 귀가한 보름달의 한쪽 다리는 언제나 절뚝거렸다
살색 의족이 검버섯처럼 변한 시간
가운데를 비웠던 어머니는
아버지 의족을 살짝 벗기시는지
바람이 흔드는 물결을 들추는 물고기가
푸드득 푸드득 꼬리를 흔들며
강물 속 안부를 전한다
*시집, 거미의 전술, 고요아침
추석 전야 - 김하경
늙은 뇌 안에 쪼그리고 앉아
제삿날 어머니는 밤을 친다
탱글탱글 여문 단맛 벌레를 불러들였는지
멀쩡한 껍질 속 알맹이가 썩었다
밤송이 같은 자존심 아직 맴도는데
껍질 속 속살은 곤충의 자리였다
울타리 안 햇살은 그늘을 말리며
해갈 없는 다모작 궁핍을 사육했다
등걸 같은 밤톨 하나 자르다 보면
난산을 치른 어머니 산고가 보이고
늦은 밤 말뚝잠이 요란하다
우려먹을 만큼 우려먹은 씨앗
까맣게 문드러져 고목이 된 지금
봄, 여름, 가을, 겨울 죽음을 준비하는 삶
잃어버렸던 시간 되돌아온 기억은 치매다
낭창낭창 풋봄은 비릿하게 불어오고
주름진 나비 꽃 위에 다소곳이 앉았다
스텐그릇 거울삼고
어둠은 참빗으로 머리 빗으며
밤하늘을 스쳐간다
죽은 아들을 기다리는 부메랑 인생
사라진 기억은 어디 갔다가 돌아온 것인가
쪼글쪼글 우듬지 말라비틀어진 기억
밤길 나섰다
썩는 줄 모르고 움푹 주저앉은 뇌
수정 끝낸 세월의 색깔은 저런 것인가
제삿날, 밤 치는 어머니 얼굴에 검은 저승꽃이 가득하다
# 오랜 기간 잘 단련된 탄탄한 시적 내공이 느껴지는 시다. 시 읽기의 완성은 독자가 얼마나 공감 하느냐다. 그늘지고 낮은 세상을 향한 따뜻한 시선이 막혀 있는 아픔을 씻겨준다. 다소 우울한 시에서 가슴에 담고 있는 시인의 아픔도 감지할 수 있다. 각도가 꺾이고 많이 서늘해진 햇살에서 멀리 가을이 오고 있음을 감지할 수 있는 요즘 딱 어울리는 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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