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울컥, 장마 - 이성목

마루안 2018. 7. 4. 20:03



울컥, 장마 - 이성목



별을 재우려고 방문을 닫았다
캄캄한 낮이었다
스위치를 누르자 꽃이 피었다
꽃의 등잔 밑에 마음이 먼저 누웠다
선풍기를 켜자 잎사귀 휘돌았다
봉창으로 민들레 마지막 홀씨가 날아갔다
목이 쉬도록 울고
우는 내가 가여워 다시 울었다
흙탕물이 사타구니 아래로 흘러갔다
뒤통수에 대숲이 검게 일렁거렸다
이미 떠난 사람의 몸을 열고
양동이 가득 붉은 물을 퍼냈다
마음을 닦아낸
걸레는 오래도록 빨아 널지 않았다


울컥, 젖은 방문이 열렸다가 닫혔다
울컥, 속울음이 개수대 구멍으로 되올라 왔다



*시집, 뜨거운 뿌리, 문학의전당








뜨거운 뿌리 - 이성목



식당주인은 펄펄 끓는 가마솥에 국수를 풀어 넣는다.
솥바닥의 푸른 김이 천장까지 끼친다.
양파는 가늘고 긴 뿌리를 뽑아 내린다.
유리잔에 양파의 입김이 뿌옇게 서려있다.
천천히, 아주 천천히
국수가닥을 건져 올리던 한 노년이
희뿌연 안경을 벗어놓고 잠시
가늘고 긴 숨을 끊어 뜨거운 국물 속에 내려놓는다.
어린 손자는 후루룩 후루룩 그 뜨거운 소리를 먹는다.
땀을 닦고, 눈물을 훔친다.
세상의 모든, 푸른 것을 밀어 올리는 뿌리는
이렇듯 뜨거운 바닥에 맨발로 서는 것이다.
젓가락 가지런히 세워 잡듯
여기, 필생의 뿌리를 내려야겠다.
칼국수를 먹는 속이 훅 달아오르고
발바닥 툭툭 터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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