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이연(異緣) - 박수서

마루안 2018. 7. 4. 19:55



이연(異緣) - 박수서



비오는 날 조간신문처럼 비닐에 밀봉되어
그와 함께 배달된다
몇 장의 전단지처럼 혀를 내밀면
금방 버려질 두려움에 어깨 뒤로 꼭꼭 숨는다
세상은 그날을 알고 있었고,
아직도 못 다한 사랑에 미쳐 날뛰던 활자가
얼룩이 되고 수류탄이 되고 미사일이 되어
그와 나를 한방 먹이려 사자처럼 달려들겠지
풀이 새파랗게 놀라겠지
그도 주저앉고 나도 누워버리겠지
석양이 길게 휘파람을 불고 누 떼가 몰려오겠지
저 푸른 초원 위 천둥 같은 이별에 놀라
누 떼가 줄행랑을 치겠지
그대로 우리는 풀이 되겠지
그대로 우리는 노란별꽃이 되겠지
벌벌 떨다 울먹이다 착한 초식동물이 되겠지



*시집, 해물짬뽕 집, 달아실








해물짬뽕 집 - 박수서



혼밥이 편한 까닭은 밥상의 세상을 혼자 벌컥 벌컥 말아 먹을 수 있어서다
눈치 보지 않고 밥상의 질서를 좌지우지할 수 있어서다
눈칫밥이 지겨운 날은 훌훌 털고 혼자 식당을 찾는다


부안군 문정로를 걷다가, 행정구역 명칭인 문정 앞에서 가슴이 아리다
한때 도반이었고 한때 스승이었던 시인 문정
그가 매몰차게 던져버린 세상을, 이 길을
강아지풀 꼬리가 흔들리도록 쿵쿵 지난다
당신 이름 너무 벅차 생각하지 않겠다며
굴삭기처럼 보도블록을 찍으며 앞만 바라보며 걷는다


삼선해물짬뽕밥에 소주 한 병을 비운 사이
말도 안돼, 그가 하모니카를 불고 있다
당신 언제 내 앞에 앉아 있었던 거야?


방긋 웃으며 홍주 병을 건네주는 그가
오늘도 혼자 산에 올랐는지
붉은산꽃하늘소 한 마리를 머리에 이고 있다






# 박수서 시인은 1974년 전북 김제 출생으로 2003년 <시를 사랑하는 사람들>로 등단했다. 시집으로 <공포백작>, <박쥐>, <슬픔에도 주량이 있다면>, <해물짬뽕 집>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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