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나는 검은 것들이 좋다 - 주병율

마루안 2018. 6. 30. 22:47



나는 검은 것들이 좋다 - 주병율



나는 검은 것들이 좋다.

사라짐으로 하여 기억되는

저 어둠의 힘

외침은 검은 어둠을 타고

빛이나 발자국들의 흔적이 지워진 땅에서

스스로 무덤이 되었던 지난 일들을 기억한다.

이제 내 안에서 흔들리던 헛된 다짐도 사라지고

그 순결한 핏줄 위에서 살아나는 어둠을 기억한다.

세상 모든 살아 있는 것들의

끈끈하고 너무나 칙칙한

어둡고 그늘진 모습

검은 입술을 기억한다.

언덕 위에서 바람이 불 때마다 흔들리는 빛

그것들이 나를 시들게 하는 이유를 기억한다.

내가 지나왔던 길이 찔레꽃 길이었거나

7월 한낮의 뙤약볕 길이었다 해도

둔중한 관의 뚜껑을 닫을 때마다 느끼는

명료한 소리의 파장은 얼마나 아름답고 눈물겨운가.

기억한다.

어둠이 빛으로 죽어가며

산다는 것에 회의하던 지난날을,

한 잔의 술을 기억한다.

시작이 검은 어둠이었던 곳에서

모든 상처는 진다.

내 뒤에는 너무 많은 것들이 있다.



*시집, 빙어, 천년의시작








장마 - 주병율



4일 만에 비가 그치고

좁은 골목에서 여자들이 싸웠다.

이년, 저년, 화냥년, 서방질 따위의 욕지거리가

분별도 없이

빗물에 고여 썩어가고 있었다.

비명소리와 같은 밤

도대체 반 평도 못 되는 월세방에서

버리고 짓밟아야 다시

살아나는 것들은 무엇이었을까.

새벽달

박쥐

형무소 뒷길

굶주림

고함

창 밖으로 허옇게 쓰러지는 반편의 기억들

니코틴이 누렇게 배인 검지와 이빨


더 이상 버리고 물어뜯을 것이 없었다.

밤도

가난도

빌어먹을 햇볕조차도

없었다.

벙어리 같은 기억이 죽어가는 밤에

햇볕이 말린 것은 어디에도 없었다.

삼 년 묵은 빚과

묵묵하게 곰팡이가 피어 부풀어 오른 벽지와

라면 봉지와

바람나 도망간 김씨네 작은 딸년의

소문까지도

4일 만에 비가 그치고

앞날이 보이지 않는 깜깜한 골목길에서

아이들은

곰팡이를 뜯어내며

또 하루를 시작하고 있었다.






# 주병율 시인은 1960년 경북 경주 출생으로 고려대학교 대학원 한국어문학과 문예창작학을 전공했다. 1992년 <현대시>로 등단했다. <빙어>가 첫 시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