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날지 않고 울지 않는 새처럼 - 이산하

마루안 2018. 6. 29. 23:06

 

 

날지 않고 울지 않는 새처럼 - 이산하


그 동안,
날지 않고 울지 않는 새처럼 살았다
이제 날개는 꺾이고 목은 녹슬었다
움직이지 않으니 움직이려고
애쓰는 힘마저 사라졌다
바람처럼 이미 스쳐간 것들
아지랑이처럼 다시 피어오르는 것들
잊혀지지 않는 것만큼 괴로운 것도 없었다

가슴속에는 모래가 쌓이고
그 사막 위로 낙타 한 마리가
묵묵히 걸어가고 있었다
사막에 지쳐 쓰러져 있으면
독수리들이 날아와
내 살을 쪼아먹었고
이따금 악어 한 마리가 나타나
낙타의 혹을 떼어가기도 했다

그랬다. 그것은
비명마저 삼켜버리는
척살 같은 세월이었다

바람에 날려다니다 다시
제자리로 돌아온 모래알들은
밤새 서로 몸을 부비며
제 살을 깎더니 마침내
흩어진 한몸으로 아침을 맞았다

모래는 허물어짐으로써 한몸이 되고
강물은 서로 생채기를 냄으로써 푸르러가는데
물방울이 모여 바다를 이루는 이 삼엄한 세월에도
내가 나를 놓지 못하고
내가 나를 붙잡아두지 못한 채

이제
저 강을 건너면
누가 나에게
저 푸르름에 대해
설명해줄까....

날지 않는 새처럼
나는 법도 잊어버리고
울지 않는 새처럼
우는 법도 잊어버렸는데

새라면 좋겠네
날개 없어도 날 수 있는
그런 새라면,
새라면 좋겠네
목 없이도 울 수 있는
그런 새라면,

아- 그러나
저 설명 없는
푸른 강이라면
더욱 좋겠네


*시집, 천둥 같은 그리움으로, 문학동네

 

 




잠행(潛行) - 이산하


내 가슴속, 칼처럼 와서 와서 꽂히는 저것은 무엇인가
유리 파편을 씹으며 확인하는 나의 숨소리, 아직은
칼로 베어낼 수 없는 이 살점 한 조각이라지만
그 살점 한 조각으로도 배부를 수 없는 질긴 목숨이라지만
그게 어디 그렇던가
혹, 그것뿐이라던가
그렇더라도

내 언제 저 무심한 발자국 소리에 놀라 잠 깬 적 있었던가
호루라기 소리에 벌떡 일어나 창살을 부여잡은 채
숨죽였던 적 있었던가
그 창살 사이로 빠져 하늘로 하늘로만 달아나는
이토록 마른 피를 내 언제 꿈이라도 꾸었던가
이젠
더 마를 피도, 더 오를 하늘마저 없는 밤
어둠이 내리고 그러면 또 어김없이 내 가슴속
칼처럼 와서 꽂히는 저, 저것은
무엇인가, 분명
새인가, 새처럼 날아다니는
푸른 옷인가

새라면, 또 새처럼 날아다니는 푸른 옷이라면
부옇게 밝아오는 새벽 하늘 어느 한 모서리쯤에서나
잠들 수 있을지, 그렇게
한순간이나마
소리 없는 곳
고요히
잠들 수 있을지

 



# 이산하 시인은 경북 영일 출생으로 부산 혜광고와 경희대 국문과를 졸업했다. 1982년 <이륭>이라는 필명으로 <시운동>에 작품을 발표하면서 등단했다. 시인은 본명은 이상백이다. 1987년 제주 4.3 사건을 다룬 장시 <한라산> 필화 사건으로 구속된 이후 절필, 11년 만인 1998년 <문학동네>로 작품활동을 다시 시작했다. 1999년에 나온 <천둥 같은 그리움으로>가 장시집 <한라산>에 이은 두 번째 시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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