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벽소령 안개 사우나 - 이원규

마루안 2018. 6. 29. 22:50



벽소령 안개 사우나 - 이원규



그대와 더불어
음력 칠월 열엿새의 벽소령에서
달빛 세례를 받고 싶었지만


이미 달은 지고
나 홀로 새벽 네시의 산길
훌훌 옷을 벗어 신갈나무 아래 감추고
알몸으로 산길을 걸었다
춤을 추었다


누구인가
하산의 인기척이라도 나면
산신령처럼
검은 바위 나무 뒤에 몸을 감추면서
슬쩍 엿보기도 하면서


산안개 촉촉이 내려
머릿결이며 속눈썹이며
온몸의 솜털이 다 하얘지도록
산신령처럼, 외로운 산신령처럼



*시집, 강물도 목이 마르다, 실천문학사








활인검 - 이원규



너무 많은 사람을 만났다
그리고 죽였다
나의 열정과 창자와 연민과
뇌의 용량보다 더 많은 사람을 만났다
그리하여 나 또한 죽어야만 했다


단 한 번도
섬을 벗어나지 못한 할머니
지리산을 떠나본 적이 없는 반달곰
그들보다 내 피의 기울기는 가팔랐다
너무 많이 죽이고
너무도 자주 죽은 것이다


어쩌면 살아생전의
예수 부처가 만난 이들보다 더 많은
메모리 초과의 인연들
혹은 악연들이
서로 지우고 서로 지워지며
나날이 내 몸속의 정자처럼 자멸했다


생명과 평화의 길은
먼저 혓바닥을 말아 넣고
사람과 나무와 동물을 되도록 덜 만나는 것
감당할 수 있을 정도로 만나
서로의 따스한 피부터 돌게 하는 것


그래도 못 견디겠다면
발로참회 비장의 카드 하나 있으니
절대고독의 칼, 활인검
자꾸 웃자라는 모가지 단칼에 베어버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