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가짓빛 추억, 고아 - 허수경

마루안 2018. 6. 28. 20:13

 

 

가짓빛 추억, 고아 - 허수경


관이 나가는 날, 할머니가 눈감을 때까지 불렀던 사위, 이모부는 돌아왔다 할머니가 사주었다던 바지, 일찍 온 저녁처럼 무릎께가 너덜거리는 그 바지를 입고

오른팔을 잃은 이모부는 밭 가장자리에 쪼그리고 앉아 보랏빛 뭉치를 하나 따서는 우적우적 씹었지

거리에서 잃은 팔을 먹어치우는 것처럼 빛은 세월의 칼로 철없이 우리의 혀를 동강 내었다

어느 날 슬플 때 빛은 무자비했나 어느 날 욕정에 잡힐 때 빛은 아련했나 어느 날 기쁠 때 가지는 사라져서 빛은 뼈 속으로 혼곤하게 스며들었다 그 뒤에 돋아나는 빛은 자지러지게 우는 갓 태어난 아이를 닮으며 사무치게 널 안았나

도둑질을 하듯 몰래 살았다는 느낌이 목구멍까지 꽉 차오를 때 가지로만 입속에 머물던 빛, 그 빛의 혀를 지금 내가 적는다면

가지라는 불투명한 평화
​보랏빛이라는 폭력
어떤 삶이라도 단 한 빛으로 모둘 수 없어서 투명해진 날개

이모부는 빛 속에서 사라지고 그 여름, 침묵하는 빛의 혀만 나부끼는 그림 속, 가짓빛은 텅 비었네 가짓빛 추억은 고아가 되었네


*시집, 누구도 기억하지 않는 역에서, 문학과지성사


 




설탕길 - 허수경


늙은 아내를 치매 요양원으로 보내고
발자국을 깊이 묻으며 노인은 노상에서 울고 있다
발자국에 오목하게 고인 것은
여름을 먹어치우고
잠이 든 초록

가지 못하는길은
사레가 들려
노인의 목덜미를 잡고 있다

내가 너를 밀어내었느냐
아니면 네가 나를 집어삼켰느냐
아무도 모르게 스윽 나가서
저렇게 설설 끓고 있는 설탕길을 걷느냐

노인은 알 수 없는 나날들 속에서는
늙은 아내가 널려 있는 빨랫줄 위로 눈이 내린다고 했다
당신의 해골 위에 걸어둔 순금의 눈들이
휘날리는 나라에서
이렇게 사라지는 것이 이상하지만은 않아서
오래된 신발을 벗으며
여름 속 밝은 어둠은 오한을 떨며 운다

 

 



*시인의 말

아직 도착하지 않은 기차를 기다리다가
역에서 쓴 시들이 이 시집을 이루고 있다

영원히 역에 서 있을 것 같은 나날이었다

그러나 언제나 기차는 왔고
나는 역을 떠났다

다음 역을 향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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