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세계화, 내 것일까 - 백무산

마루안 2018. 6. 28. 19:47



세계화, 내 것일까 - 백무산



지갑을 잃어버렸다
어디 떨어뜨렸는지 누가 훔쳐갔는지
헌 지갑에는 내게 둘도 없는 소중한 사진이 있고
당장 없으면 안될 연락처가 들어 있다
누군가 횡재다 했다가 펴보고는
투덜거리며 휙 집어던졌을 테지만


물을 마시다 생각한다
수도꼭지에서 그냥 흘려버리는 저 물은
사막에서 목마른 누군가 잃어버린 것은 아닐까


냉장고에서 썩은 고등어를 버리다가 누군가
식구들 먹이려고 잡았다가 어디서 빼앗긴 것은 아닐까


무료한 권태로 하수구로 흘려보낸 시간은
누군가 무상의 노역에 잃어버린 청춘의 시간은 아닐까


오늘 하루 심심풀이로 써버린 여러 기회들은
누군가 필생을 다해 준비해둔 약속은 아닐까


어제 소모한 자질구레한 나의 분노는
어디서 삶을 빼앗긴 누군가
짓밟혀 내지르지도 못한 분노는 아닐까



*시집, 폐허를 인양하다, 창비








세계의 변두리 - 백무산




오래전 그 일로 후회하고 수시로
후회한 일 한가지는
부산 제3부두 파나마 선적 살물선(撒物船)
떠나는 그 배에 손을 흔들었던 일


약속을 하고도 떠나지 않았던 일
그때 떠났더라면 뱃놈으로 늙어갔을지도
남태평양 적도 부근에서 섬 여자 얻어 어부가 되었을지도
그때 떠났더라면
그단스끄나 함부르크 조선소 불법체류 노동자가 되었을지도
잠자는 나를 반쯤 겁탈했던
삼등항해사 게이 녀석과 사랑에 빠졌을지도
항구를 그리며 떠도는 삼류 화가가 되었을지도


그때 떠났더라면
시베리아 순록 몰이꾼이 되었을지도
볼리비아의 무장 게릴라가 되었을지도
안데스의 목동 가우초가 되었을지도
그때 떠났더라면
이곳에 없는 나 때문에
이렇게 변두리에서 가슴 치는 일로 나이 먹진 않았을지도


내게 많던 나는 어디론가 떠나버렸다네
지금의 나를 만든 건 내가 아니므로
나는 내가 꾸는 꿈보다 더 가짜일지도 모르지
실현되지 못하고 떠나버린 내가 더 나다울지도 모르지
그런 내가 떠난 곳도 저 먼 변두리


세계의 모든 변두리에서 나는 나를 만져볼 수 있네
세계의 변두리를 떠돌고 있는 수많은 나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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