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오래된 구두 - 김태완

마루안 2018. 6. 27. 23:23

 

 

오래된 구두 - 김태완


가지런히 놓인 구두
아버지가 돌아오신 모양이다
누추한 하루의 일과를 마친
아버지의 귀가는 늘 무거웠던가
어머니는 흐트러진 아버지의 고된 걸음을
가지런히 정리해드린 모양이다

뒤 굽이 마모된 흔적
왼쪽과 오른쪽이 서로 다르다
하루의 생업은
어느 한쪽을 결정하는 기로 같은 것

아버지의 아무렇게나 벗어던져진 구두
초췌한 상처를 품고 돌아온 저녁이면
어머니의 손길로 위로받고 싶었던 모양이다
거친 세상 앞에 참담하고
비겁하거나 비굴하게 견딘 흔적을
그렇게 가지런히 정돈하는 것이다
그렇게 말하는 것이다

꽃이 피지 않는 늙은 꽃나무를 어루만지는
어머니의 저녁이 다 되어도
가지런히 놓여있던 구두가 보이지 않는다
힘겹게 몇 송이 꽃 피어나던 날
아버지는 기약의 말씀도 없이
아주 먼 길을 가셨나보다


*시집. 왼쪽 사람, 문학의전당

 

 

 

 

 

 

완벽한 노래 - 김태완

 

 

잊는다는 것과 잃어버리는 것은

서로 다르지만 아주 다르지는 않은 거지

 

즐겨 불렀던 옛 유행가 한 곡조

고향친구들과 단골 식당에 모여 적당히 취기가 오르니

옛날 생각에 함께 흥얼거리는 맛이

삼겹살 몇 점보다 쫄깃쫄깃하다고

돌아가며 한 곡씩 시작하는데

그 많은 노래 중에 마땅히 부를 노래가

떠오르질 않아

최근에 불렀던 노래 하나 간신히 기억해서

옆 친구 노래가 끝나자마자 이어 부르기 시작했는데

아차, 다음 가사가 생각이 안 나

머릿속이 하에져

결국, 내 노래를 끝으로 술잔은 다시 비워지고

나의 기억력도 한 잔 술에 비워지고

 

잊는다는 것과 잃어버리는 것은

결국, 나쁜 습관과 관련이 있지 않을까

노래방 모니터의 가사를 보면서 부르던 습관

그것이 습관인 줄도 모르고

하찮은 노래 가사 굳이 외워둘 필요도 없는 세상을

익숙하게 살아가는 내가

오랫동안 잊었던 건 노래가사 한 줄만이 아니구나

더러운 것은 끌어안고

소중한 것은 버리면서

무슨 노래를 부르고 싶었던 것일까

 

잊는다는 것과 잃어버리는 것은

서로 다르지만 아주 다르지는 않은 거지

 

 

 

 

# 김태완 시인은 충북 청원에서 태어나 신탄진에서 성장했다. 2000년 계간 <오늘의문학>에 시가 당선되어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시집으로 <추억 속의 겨울은 춥지 않다>, <마른 풀잎의 뚝심>, <왼쪽 사람>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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