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야매 미장원에서 - 조연희

마루안 2018. 6. 19. 21:48



야매 미장원에서 - 조연희



유난히 머리가 빨리 자라던 그해 여름
간판도 없는 미장원에 갔다.
예약도 없이 갔다.
낡은 마루에서는 덜걱덜걱 꽃들이 피고
봉충다리 의자에선 햇빛이 삐거덕삐거덕 졸고


거울도 없는 미장원에 갔다.
당신은 늘 그렇게 '야매'로 왔으므로
무면허 미용사는 이빨 빠진 가위로
내 덧없는 그리움의 길이를 가늠했다.
근심처럼 손톱과 발톱이 자라고
더러 잘못 자른 머리로 목덜미가 더 길어지기도 했다.


나팔꽃 씨방 같은 미장원에 갔다.
파마약 냄새가 넝쿨인 양 머리 위에서 구불거리고
골방에선 서둘러 까만 씨앗이 되는 꽃들


당신은 속성으로 붉어지는 노을이었다.



*시집, 야매 미장원에서, 노마드북스








亭子 略史 - 조연희



모래내 127번지 정자에 가면
아침부터 가랑이를 벌리고 있는 그녀를 만날 수 있다.
온갖 사내들의 술냄새가 기어올라도
거품 같은 웃음 흘리며
그녀는 무엇을 응시하는 것일까.


버림받은 것들은 모두 구겨져 있다는 듯
정자 주변엔 유난히 구겨진 것들로 수북하다.
구겨진 가라오케 구겨진 담보대출
어쩌면 구겨진 남정네들이
저 장자 위에서 뻘뻘, 재개발을 서둘렀는지도 모른다.


모래내 정자는 정자(精子)의 정자다.
팬티도 안 입은 그녀의 민숭한 정자가 자꾸 깊어지는 것은
저 정자(精子)들의 습기 때문이다.
비릿한 몸냄새를 풍기며 정자가 철거되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호주머니 속 꼬깃꼬깃한 것들을 던져버리고
발정 난 고양이나 유기견이 킁킁,
그 구김의 내력을 읽고 간다.


모래내 소문이 수북한 골목을 돌다보면
어느새 사라진 정자
무정자의 햇빛만이 스멀스멀
자꾸 그 빈터 위에 내려앉고.





# 조연희 시인은 1966년 서울 출생으로 추계예술대 문예창작과를 졸업했다. 2010년 <시산맥> 신인상으로 등단했다. 현재 (주)빅시스템즈 기획실장이며 영상기획자 및 시나리오 작가로 활동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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