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모텔에서 울다 - 공광규

마루안 2018. 6. 19. 21:31



모텔에서 울다 - 공광규



시골집을 지척에 두고 읍내 모텔에서 울었습니다
젊어서 폐암 진단을 받은 아버지처럼
첫사랑을 잃은 칠순의 시인처럼
이젠 고향이 여행지라는 생각을 하면서
얼굴을 베개에 묻지도 않고 울었습니다


오래전 보일러가 터지고 수도가 끊긴
텅 빈 시골집 같은 몸을 거울에 비춰보다가
폭설에 지붕이 내려앉고
눅눅하고 벌레가 들끓어 사람이 살 수 없는
쭈그러진 몸을 내려보다가


아, 내가 이 세상에 온 것도
수십 년을 가방에 구겨 넣고 온 여행이라는 생각을 하다가
이런 생각을 지우려고
자정이 넘도록 텔레비전 화면을 뒤적거리다가
체온 없는 침대 위에서 울었습니다


어지럽게 내리는 창밖의 흰 눈을 생각하다가
사랑이 빠져나간 늙은 유곽 같은 몸을 후회하다가
불 땐 기억이 오래된
컴컴한 아궁이에 걸린 녹슨 옛날 솥의 몸을
침대 위에 던져놓고 울었습니다



*시집, 파주에게, 실천문학사








헛간을 짓다가 - 공광규



장마에 무너진 시골 헛간을 헐고 다시 짓는데
동네사람들이 지나가며 한마디씩 한다


-이 사람, 주춧돌도 놓을 줄 모르는구먼
-그 나이 먹도록 기둥 한번 안 세워봤구먼


동네사람들 말 듣고 이렇게 저렇게 해보다가
하루 종일 기둥도 못 세웠다


저녁을 먹고 마루에 나와 별을 보는데
내가 지금껏 이렇게 살아왔다는 생각이 든다.


평생 남의 말만 듣고 살아
오십이 넘어서도 헛간 한 채 못 짓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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