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탑골공원 - 박승민

마루안 2018. 6. 12. 21:01

 

 

탑골공원 - 박승민


아코디언이 낡은 청춘의 시간을 불러낸다
참전용사 김 씨는 한 시간 전부터
돋보기로 한 자 한 자 짚어가면서
신문의 사설을 따라 읽는다
슬쩍 연정을 품었던 전쟁미망인은
중절모에 꿩털을 꽂은 퇴직 교장을 따라
오늘도 그린필드 모텔로 가는가 보다
내가 장기에 진 유가 놈은
연신 담뱃값 우그러진 상을 하며
담배연기만 배롱나무 쪽으로 풀풀 날린다
오늘은 무료봉사 배식차도 쉬는 날
아침에 눈살 찌푸리던 며느리를 생각하면
김정일이보다 아들놈이 더 밉다
북한에 퍼줄 돈이 있으면
노령연금이나 올려주지!
고생이 뭔지도 모르는 젊은 것들이
턱, 턱 야당에 몰표나 주고
아, 이놈의 벚꽃은 왜 자꾸
눈앞에 얼쩡거리는 거야
오늘은 목구멍에 낀 가래도 딱 누워
종일 왼새끼를 꼰다
3,000원짜리 백반을 먹을까
1,500원짜리 라면을 먹을까
이리저리 생각이 많아지는 날이다
먼저 간 마누라 생각에 지팡이에 힘이 빠지는 날이다


*시집, 슬픔을 말리다, 실천문학사

 

 

 



풍(風) - 박승민


신호등이 파란불로 바뀌었는데도
신발은 날아오르지 못한다.
말년의 바람은 지팡이로 횡단보도를
낡은 타악기의 스틱처럼 힘없이 두어 번 두들겨보는 일

차도와 인도 사이를
빠르게 건너오는 타조의 붉은 발들을
조는 듯 무연히 바라보다
엉거주춤한 생각에 빠진 무릎

한때
바람을 매단 저 발로 가문의 족보를 찢고
처처곳곳 자신의 혈 자리를 찾아
평생 바람의 변방을 떠돌았으나
남은 것은 몸속에 들어와 굳게 잠겨버린 바람
흰색형광선이 마지막 금계포란형이라도 되는 양
날개를 부채처럼 겨드랑이에 접은 채
녹색등을 오래 배웅하고 있다.

두 눈이 왼쪽으로 쓰러졌다가 멀리 날아갔다가
느리게 붉은 구름 속으로 사라진다.

 

 

 

 

# 박승민 시인은 1964년 경북 영주 출생으로 숭실대 불문과를 졸업했다. 2007년 <내일을 여는 작가>로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시집 <지붕의 등뼈>, <슬픔을 말리다>가 있다. 박영근작품상, 가톨릭문학상 등을 수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