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그리운 뒤란 - 권덕하

마루안 2018. 6. 7. 21:23

 

 

그리운 뒤란 - 권덕하


내 몸에는 모른 체해 주는 뒤란 있어
눈물이 마음 놓을 수 있었다
낙수에 패인 자리 바라보는 일은
밀려난 풀만큼이나 자신을 달래는 일이었고  

댓잎 만지작거리며 바람 쐬기도 하고
손톱만큼 자란 수정도 보고
숨겨둔 일 고백하듯 까만 꽃씨 받다가  

텃밭으로 나가 지붕 내려다보며
고욤이 그렇듯 떫은 것도
풀덤불에 두어 그리운 것 되면 상강 지나도록
표해 놓은 삭정이만 봐도 좋았는데  

뒤란 사라진 몸
정처 잃고 잦은 슬픔에 먹먹하다
금간 오지그릇처럼 철사로 동이고 싶은 마음
조금씩 뒤틀리고
붉은 혀 감출 데 없이 시드는 것도
꽃대궁의 일로만 남아 신경이 쓰이다


*시집, 생강 발가락, 애지


 

 



빈집 - 권덕하


집이 전화받고 싶을 때가 있다 의자나 식탁도 귀 기울이다 모서리 질 때 있다 혼자 살다 무너진 사람 대신에

선사유적도 통화하고 싶어 푸른 잔디 덮고 뒤꼍에 대나무를 기르는 것이다 봄에 진 낙엽 가으내 그대로 둘 것이다 선배는 김장배추씨 뿌리다가 전화 받고 무사하라고 이르는데

어둠만이 비어 있는 곳 알아내 고인돌 같은 마음 한구석 어두워 올 때 아직도 옛 번호 지우지 못하고 가을역 부근에서 거기 어디냐고 묻는 사람이 있다

먼 산 마음도 불빛 하얗게 바래도록 장지에 머물다 가는, 그런 유적 같은 밤이 지나고 처마 밑 낙숫물 듣던 자리에 다하지 못한 몇 마디 말이 패여 있어

흙투성이로 돌아와 귀 가까이 신발 틀어쥔, 행색도 비어 있는 집




# 권덕하 시인은 대전 출생으로 2002년 <작가마당>으로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생강 발가락>이 첫 시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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