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수선하러 갔다 - 천세진

마루안 2018. 6. 6. 18:50

 

 

수선하러 갔다 - 천세진


오랫동안 써왔던 가면에 금이 갔다
10년 이상을 잘도 버텨주었다
모두들 이 가면을 믿고 일을 맡기고
술잔을 나누었다
어떤 사내는 그의 비밀을 털어놓기도 했다
나도 누군가에게 비밀을 털어놓았는지 모른다

수선집 사내는 손놀림이 능숙했다
"늘 여분을 챙겨두세요. 가면에 금이 가는 상황은 빗방울만큼이나 많습니다. 수선은 낡은 것을 좀 더 유지시켜줄 뿐입니다. 소수의 취향일 뿐이지요. 수선이 제 직업이지만, 제 것 모두를 수선하지는 않습니다. 30년 동안 이 자리를 지킨 비결이죠."

말을 주고받으면서도
일정한 속도로 가면을 수선하고 있는 사내가
깨달음의 스승처럼 존경스러워졌다

가면이 수선되는 사이
소낙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거리를 지나던 형형색색 온갖 표정의 가면들이
팽팽한 긴장을 놓아버리고
비를 피해 건물 속으로 달려 들어갔다
모두 같은 표정이었다


*시집, 순간의 젤리, 천년의시작

 

 




제게도 편견 하나를 주소서 - 천세진


화려한 치장을 한 축제의 무리들이 거리를 다 지나칠 때까지 그들은 재갈 물리고 팔다리 묶인 채 음습한 지하실에 가두어져 있었다

신속하고도 단호한 평결이 내려졌다 판사는 도시의 지도자를 대신하는 심정으로 결연하게 단죄의 변을 토했다

"감히, 굶주림을 잊게 하고, 마천루를 세워 하늘을 가리고, 육욕의 지하세계를 번성케 하고, 각각의 인생에 따로 적용되는 화려한 수사의 법전을 이룩하고, 만인을 위하여 영혼을 파는 고통을 감내한 위대한 선지자를 비난하다니! 감히, 만인 평등의 불온한 유언비어를 퍼뜨리다니! 너희의 비명은 아무도 듣지 않는 시간과 거들떠보지 않는 장소를 오래도록 떠돌게 될 것이다!"

불온에 감염된 그들의 고통은 명명할 수 없는 질병으로 판명되었으며 실종은 가장 흔히 나타나는 병증인 것으로 발표되었다

발표가 끝나자마자 질병에 걸린 또 한 사내가 경비를 뚫고 탈출하여 마천루에 서서 외쳤다

"제게도 편견 하나를 주소서. 그러면 제가 세상을 움직이리라."*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의 <예고된 죽음의 연대기>에서 변용

 

 

 

 

# 천세진 시인은 충북 보은 출생으로 고려대 영문과를 졸업했고 한국방송대 대학원 문예창작과를 졸업했다. 2005년 계간 <애지> 신인문학상으로 등단했다. <순간의 젤리>가 첫 시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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