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비밀의 문 - 이용헌

마루안 2018. 5. 26. 22:50

 

 

비밀의 문 - 이용헌

나무 위에도 문이 있다는 걸 어떻게 알았을까

한 사내가 제 몸을 나뭇가지에 걸어놓고 하늘로 떠났다

주머니에선 하늘로 가는 차표 대신 한 장의 쪽지가 발견되었다

쪽지에는 그가 사랑했던 이름들과 뜻 모를 숫자들이 나열되어 있었다

사람들은 몸만 남겨두고 영혼은 사라진 문의 비밀번호가 궁금했다

날이 밝기 전 사내는 아무도 모르게 집을 나섰을 것이다

일생을 열고 닫았던 문과 문마다 그의 지문이 파문을 그렸을 것이다

현관문을 열고 나와 택시 문을 닫을 때까지만 해도

그가 지상의 마지막 문을 닫았다는 걸 안 사람은 없었을 것이다

그는 왜 소리마저 다 걸어 잠그고 하늘로 갔을까

날개를 잃은 새는 하늘을 날 수 없어도

몸뚱이를 잃은 사람은 하늘을 날 수 있는 법

그는 한 치의 망설임 없이 돈과 사랑을 선택했듯이

한 치의 망설임 없이 절망과 배신 앞에 생을 접기로 했을 것이다

그리고는 스스로 열리지 않는 미명의 문 앞에서

스르르 열 수 있는 비밀번호를 남기며 나뭇잎처럼 몸을 떨었을 것이다

말을 걸어 잠근 하늘마다 소문들이 매달려 있다

문설주 없는 문을 지나 어둠의 저쪽을 건너가면

별빛 푸른 그곳에서도 나무들은 자랄 테고

뿌리에서 둥치를 거쳐 우듬지에 이르기까지

나무엔 한 사내의 비밀이 손금처럼 환히 요약되어 있을 것이다

*시집, 점자로 기록한 천문서, 천년의시작

 

 

 

 

 

 

양철지붕 이발소가 있던 자리 - 이용헌

유년의 양철지붕이 너붓거리고 있었다. 이발소 삼색등이 허공에 나사를 조이고 있었다. 흰 가운을 걸친 구름이 김칫국물 같은 노을을 닦으며 지나갔다. 산발한 나무들은 가으내 까칠해진 머리들을 자르기 위해 낮 동안 품었던 새 떼를 강가로 날려 보냈다. 새 내려앉은 자리마다 사각사각 가위질하는 소리가 들렸다. 웃자란 억새들이 파르르 모가지를 흔들었다. 바리깡 지나간 들판에는 마른버짐처럼 폐비닐이 나풀대고 누대에 걸쳐 소를 몰고 돌아가던 둑길엔 어린아이의 그림자조차 보이지 않았다. 흔적을 남기지 않는 것은 그 마을의 오랜 내력, 장성한 사내들은 하나둘 둑길을 서성이다 지워졌다. 몇몇 남은 촌로만이 툇마루에 쪼그린 채 콩을 고르거나 사라진 굴뚝 대신 담배 연기를 내뿜었다. 떠나는 것들은 사람만이 아니었다. 더러는 강가의 나무들도 뿌리째 실려 나갔다. 떠나가는 것보다 힘든 일은 혼자 남아 누군가를 배웅하는 일, 맨발의 어머니가 먼저 간 형을 묻고 주저앉던, 지금은 무덤 속 아버지가 이발을 기다리는 그 마을, 거기 유년의 양철지붕은 없었다. 스러진 삼색등이 이승과 저승 사이에 나사를 조이던 벌초길.

 

 

 

*시인의 말

끝내는

다 사라질 것이다

하늘엔

별빛만 반짝거릴 것이다

이 얼마나

다행스러운 적멸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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