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당신이라는 이유 - 김태형

마루안 2018. 5. 26. 22:37



당신이라는 이유 - 김태형



발목께 짐을 내려놓고 서 있을 때가 있다
집에 다 와서야 정거장에 놓고 온 것들이 생각난다
빈 저녁을 애써 끌고 오느라
등이 무거운 비가 내린다
아직 내리지 못한 생각만 지나갈 때가 있다
다 늦은 밤 좀처럼 잠은 오지 않고
창문 가까이 빗소리를 듣는다
누가 이렇게 헤어질 줄을 모르고
며칠째 머뭇거리고만 있는지
대체 무슨 얘길 나누는지 멀리 귀를 대어보지만
마치 내 얘기를 들으려는 것처럼
오히려 가만히 내게로 귀를 대고 있는 빗소리
발끝까지 멀리서 돌아온
따뜻한 체온처럼 숨결처럼
하나뿐인 심장이 두 사람의 피를 흐르게 하기 위해서
숨 가쁘게 숨 가쁘게 뛰기 시작하던 그 순간처럼



*시집, 코끼리 주파수, 창비








절벽은 다른 곳에 있다 - 김태형



옛 그림에서나 잠깐 보았던 무릉을
한 절벽 앞에서 마주친다
그러나 그 무엇이라도 그리워하지 못했으니
이 앞에서 나느 그저
한 걸음조차 뛰어내릴 수 없는
막다른 길일 뿐
나 혼자뿐이라고 생각하자
가파른 절벽처럼 여기서
떨어져 사라져도 좋았을 아찔한 순간들이
주차장 뒤로 사라지고 없다
그 밑에 벌통 몇개 놓여 있다
뭐 먹을 게 없나 하고
커다란 동네 개들이 어슬렁거리고 있다




'한줄 詩' 카테고리의 다른 글

그 새는 어디로 갔을까 - 이강산  (0) 2018.05.26
비밀의 문 - 이용헌  (0) 2018.05.26
불가능한 것들 - 이병률  (0) 2018.05.26
산으로 가는 아이 - 장호  (0) 2018.05.26
잊혀진 계급 - 조숙  (0) 2018.05.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