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학문이 열리던 날 - 송경동

마루안 2018. 5. 5. 23:13



학문이 열리던 날 - 송경동



포클레인 위에서 떨어진 후
병원에 안 가겠다고 다시 기어올라가
손수건으로 감싼 나무토막을 입에 물고
텐트 안에서 일곱시간을 버텼다
뒤늦게 달려온 정보과 형사들이
혹시라도 먹잇감을 놓칠까봐
포클레인 주변을 떠나지 않았다


밤 12시, 앞뒤에 망차를 한대씩 따라붙이곤
몰래 병원으로 향했다 발뒤꿈치뼈가
비스킷마냥 부스러져 있었다
퉁퉁 부어 수술이 안된다고
진통제만 맞으며 하루를 더 버텨야 했다
끝까지 농성을 지키지 못한 게 더 뼈저리고
참을 수 없이 고통스러웠지만
그만큼 노력했으면 됐다 했다
학벌도 뭣도 없어 남들처럼 내놓을 게 없는데
뒤늦게 발 한짝이라도 내놨으니
이제 나가면 정말 운동 한번
제대로 해보겠구나 했다


그러나 빌어먹을, 복병은 따로 있었다
그것은 내 안에 시커멓게 숨어 있었다
나름 고공농성이라고 부분 단식을 해왔는데
이십여일 만에 처음으로
숙변을 보라고 기별이 온 날
혼자서 간신히 휠체어에 올라타고 몇번이고 나서보는데
포탄처럼 굳은 변은 나오지 않고
피가 쏠린 다리는 실밥이 터질 듯 아프고
말뚝 박힌 듯 한번 열린 뒤는
찢어진 채 닫히지 않고
아, 이런 전투는 처음이야
눈물 콧물 흘리며 혼자 용을 쓰는 밤


비로소
운동이 무엇인지를 알게 되었다
진짜 운동은 입으로 하는 게 아니라
뒤로 하는 것임을
고귀한 영혼의 일이 아니라
이렇게 고통스럽고 지저분한 몸의 일임을
항문이 찢어지며 알게 되었다


그날 이후 다시는
운동은 온몸 바쳐 해야 한다는 말을
쉽게 입에 담지 못한다



*시집, 나는 한국인이 아니다, 창비








먼저 가는 것들은 없다 - 송경동



몇 번이나 세월에 속아보니
요령이 생긴다 내가 너무
오래 산 계절이라 생각될 때
그때가 가장 여린 초록
바늘귀만 한 출구도 안 보인다고
포기하고 싶을 때, 매번 등 뒤에
다른 광야의 세계가 다가와 있었다


두번 다시는 속지 말자
그만 생을 꺾어버리고 싶을 때
그때가 가장 아름답게 피어나보라는
여름의 시간 기회의 시간
사랑은 한번도 늙은 채 오지 않고
단 하루가 남았더라도
우린 다시 진실해질 수 있다





# 송경동 시인은 1967년 전남 벌교 출생으로 2001년 <내일을 여는 작가>와 <실천 문학>을 통해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시집으로 <꿀잠>, <사소한 물음들에 답함>, <나는 한국인이 아니다>가 있다. 천상병 시문학상, 신동엽 창작상, 고산문학대상 등을 수상했다. 2017년 미당문학상 후보에 선정되었으나 수상을 거부해 화제가 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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