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뭐가 이리 붉은가 - 최문자

마루안 2018. 4. 28. 20:45



뭐가 이리 붉은가 - 최문자



희망은 얼마나 나쁜 높이까지 올라가는지
희망이 잠복기를 거치는 동안
고통은 후회를 가르친다
혀의 반쪽은 늘 붉다
말보다 더 많은 후회를 맛보고 있다
맛은 어떨까
혀가 후회를 말하는 동안
이렇게 모른 척 희망은 무거워진 후회의 모서리를 돌고 있다
매일매일 후회가 쉽게 붉어진다
희망의 주름 속에
아주 작고 모난 꽃이 만발하는 후회들이 살고 있다
과거의 길이를 지키며 삼키거나 잘 우는 것들
내 후회는 뭐가 이리 붉은가
얼마나 더 부끄러워야
얼마나 더 붉어져야
희망이 되는가?



*시집, 파의 목소리, 문학동네








열무의 세계 - 최문자



여기선 휘파람이 나오지 않는다


희망엔 좀더 울음이 필요한데
열무처럼 푸르면 그냥 희망이라 믿었다


푸른빛의 열무야 거짓말아
푸른 건 푸르게 쏟아지는 재앙일지 몰라 가끔 우는 것 가끔 죽는 것 가끔 아픈 것 가끔 무섭고 서러운 것도 기막히게 푸르다


희망을 안고 자면
이튿날 아침이 불행했다
매일매일 간절하게 얼굴을 씻어도
휘파람이 나오지 않았다


수만 평의 열무 밭
절망 한 모금 없이도 여기서는 푸르게 익사할 수 있다


푸르면서 날개 달린 게 나는 제일 무서워
기형도처럼 숨어서 문구멍으로 희망을 내다본다


열무와 열무 아래
여기도 여전히 푸른 이후의 삶이 있다
저중에
덜 푸른 병에 걸려 죽은 자도 있다
함께 같이 모두 열무인 희망이라던 저중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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