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목 없는 나날 - 허은실

마루안 2018. 4. 26. 23:39

 

 

목 없는 나날 - 허은실


꽃은 시들고
불로 구운 그릇은 깨진다 

타인을 견디는 것과
외로움을 견디는 일
어떤 것이 더 난해한가 

다 자라지도 않았는데 늙어가고 있다
그러나 감상은 단지 기후 같은 것 

완전히 절망하지도
온전히 희망하지도
미안하지만 나의 모자여
나는 아무것도 믿지 않는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허상
녹슬고 부서지는 동상(銅像)보다는
방구석 먼지와 머리카락의 연대를 믿겠다
어금니 뒤쪽을 착색하는 니코틴과
죽은 뒤에도 자라는 손톱의 습관을
희망하겠다

약속보다는 복숭아의 욕창을
애무보다는 허벅지를 무는 벼룩을
상스러운 빛보다는
거울 속에서 나를 바라보는
희미한 어둠을 

캄캄한 길에선
먼 빛을 디뎌야 하므로 

날 수 없어 춤을 추는 나날

흔들리는 찌를 지니고 사는 사람들은
별자리를 그린다


*시집, 나는 잠깐 설웁다, 문학동네

 

 

 

 

 

 

윤삼월 - 허은실


노인들은 화투점을 본다

매화 벚꽃 낭창하니
부음이 들려오기 좋은 날이다

햇빛에서는
개 꼬실르는 냄새

치매에 걸린 가지들 아래

배드민턴 흰 공이
하늘을 잡았다 놓는다

피어 조화가 되는 꽃들
산 채 묻힌 것들의 눈빛을 닮는다
죽은 아이들이 뜬눈으로 태어나 휘둥그레하다

귀신도 모르게 수의를 짓고 이름을 바꾸고
귀신도 모르게 달을 낳지

목을 지나온 검처럼
꽃잎을 가르는 허공
그 틈으로

소식이 올 것 같다

가지에서 바닥까지의 무한,
무겁구나

나무들 수의를 벗는다

눈알을 핥는
연분홍 꽃잎들
다 누구의 빠진 손톱인가



 

# 허은실 시인은 1975년 강원도 홍천 출생으로 2010년 <실천문학> 신인상으로 등단했다. <나는 잠깐 설웁다>가 첫 시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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