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일방통행로에서 보는 신호등 - 김해동

마루안 2018. 4. 26. 18:50

 

 

일방통행로에서 보는 신호등 - 김해동

 

 

개망초 핀 언덕길을 지나

일방통행로에 들어섰다

노을에 젖은 신호를 받는 황망한 시간

 

20년 가까이 남의 부채를 떠안고

더러는 산에도 가고

때로는 새벽녘

학교 운동장을 수십 바퀴씩 돌면서

그래도 '잊는 것이 사는 길'이라고

희미한 나무들은

그대로 숲이 되었다

 

기다린다는 어리석은 기대가

얼마나 치명적인 댓가를 치루게 하는지

 

전혀 무관하게 슬쩍 끼어드는 차량도

눈 감아 주어야 했다

 

들풀처럼 한자리에 나서

서로가 전부였던 우리

상처가 무엇인지 배반이 무엇인지

그저 삶이 상처라며

일방적으로 바라보며 살아 온 사람

한 번 잘 못 들면 때와 장소도 없이

체증에 시달리게 한다

일방통행로에서 보는 신호등처럼

 

 

*시집, 비새, 종문화사

 

 

 

 

 

 

터널 - 김해동

 

 

하루를 살면서도 터널 몇 개씩 지난다

 

수의계약처럼 어딘가에 견적되어 있을

나의 생활

주파수를 놓친 난 시청지대로

공복의 아침을 달려 나가는

애벌레 같은 얼굴들

 

무사히 돌아올 수 있을까

우선 탁한 공기를 피하여 숨을 멈추고

차폭등을 켠다

상대 불빛을 실눈에 꽂으며

세상 가장 깊숙이 앉아

어두운 껍질 하나씩 벗는다

낭하의 지름길로 높게 나르며

때론 없다는 것이

이렇게 가벼운 힘이 될 줄이야

 

모든 브레이크를 풀고 싶은 저녁이면

밤의 수문을 열고

불빛만 흘러 보내는 터널

어둠을 밀어내면서 기다린다

 

뜨겁게 날아드는 불나방들의

마지막 귀향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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