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꽃 피는 난간 - 김왕노

마루안 2018. 4. 26. 19:03



꽃 피는 난간 - 김왕노



저녁이면 추락을 무릅쓰고 나서는 난간이다
오늘도 난간에 서면 하루가 아찔해지고 너는 보이지 않는다
난간 모서리를 잡고 어디쯤 가고 있을까 가늠하면
도시의 끝 쪽이 보이고 도시로 찾아드는 황혼과
하루를 바다에서 탕진해버린 채 공원 숲으로
내려앉는 황금 새 떼
벌써 안식을 키우며 번져오는 어린 잠
그리움은 더 먼 쪽을 보기 위해 난간 밖으로 몸을 내밀고
난간에 선 상심한 마음을 위로하려
스스로 길을 닦고 북소리처럼 다가오는 불빛
그리운 네 편지 행간 행간 속에 피어 함께 사위어 가던
촛불 같은 꽃등 같은


무거운 영혼일수록 난간으로 나서기 쉽지 않는다는 것
하지만 더 먼 곳을 나서려다 아차 기우뚱하며 벼랑으로
추락해 가는 몸
추락하다 떠나온 난간을 바라보면
언제 네가 왔다 울고 간 흔적인가
저 환한 꽃 한 송이


이제는 다시 되돌아갈 수 없는
아! 꽃 피는 난간



*시집, <사랑, 그 백년에 대하여>, 천년의시작








마음에 둔다는 말 - 김왕노



마음에 둔다는 말 아나요. 말은 하지 않으나
마음에 두고 산다는 말 얼마나 은근하고 부드럽나요.
좋던 좋지 않던 마음에 두고 산다는 말
마음에 둔 이름
남모르게 입 안에서 굴리고 굴리면서 산다는 것


나도 살아오면서 마음에 둔 이름이 있습니다.
달밤이면 마음에서 메밀꽃처럼 하얗게 일어나는 이름


마음에 둔 이름 하나 때문에 집을 나서고
마음에 둔 이름 하나 때문에 꽃을 심고
마음에 둔 이름 하나 때문에 남몰래 울고
마음에 둔 이름 하나 때문에 비를 혼자 맞는
마음에 둔 이름 하나 때문에 목숨을 거는


마음에 두었기에 누구도 낙서처럼 지우지도 못하고 약탈 할 수도 없는 이름
누구도 버려라 강요할 수 없는 이름
달밤에 바람 불면 견딜 수 없게 마음에서 물결치는 이름


마음에 둔 이름 하나 부르기 위해 극지로 가고 사투를 하고
마음에 둔 이름 하나 부르려 빛발치는 총탄 속에서 깃발을 흔들고
마음에 둔 이름 하나 부르기에 난 밤의 꼭대기로 갑니다.
마음에 두었기에 혼자 미친 듯 부르다가
가난한 잠이라도 들어야 하므로 밤의 꼭대기로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