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뽕짝 - 이제하

마루안 2018. 4. 23. 22:18



뽕짝 - 이제하



'모래와 모래 사이'를
'모래와 모래 사이에 바다가 있다'라고 하면
어떻겠냐고


'장미와 장미 사이엔 가시가 있다'를
'장미와 장미 사이엔 길이 있다'라 고치면
책이 더 팔리지 않겠느냐고


오늘도 뽕작이 운다.
돈 보내라
죽은 별에게
공갈은 치지 말라


내 가야 할 곳은
은자(隱者)의
뒤안길


그 바다 끝에
갈앉는
침묵
이별의


부산 정거장, 목포의
눈물



*이제하 시집, 빈 들판, 나무생각








역(驛) - 이제하



기다리는 사람의 천(阡)의
끔찍한 얼굴들을 보아버린 나머지
가장 중후하고 성실한 차림으로 덜덜 떨며
가장 중요한 사람을 기다릴 수밖에는 없다고
믿게 되어 버린다


지붕 위에 명목(暝目)하는 불길한 새같이
꼴사납게도 창자 속에서
한 번밖에 없는 사랑을 까욱, 까욱
짖어대기나 하면서


누가 뭐래도 일편단심, 그렇다고 빨갱이는 아냐
차라리 나는 검어, 칠면조의 복합잿빛 같은
인간의 일곱 가지 기분의 유장한
그 유장한 총화(總和)
세상에서 가장 근사한 제복의 역장 나으리가
뚜벅,뚜벅


오지 않는 열차
팔목시계처럼 길바닥에
동댕이치더라도
승강구에는 절대로
보이지 않을 그 얼굴


악어가죽 혁대, 수석판사 수염
낙제생의 가방, 대통령의 안경
절박한 강도의 칼에 찔려서,
설백의 빙원(氷原), 설설 기는
곰의 나라, 죽은 모자 속의


오랑우탕의 하얀 사령(死靈)을 훔쳐다 바치는
개찰구 저쪽의
피가 마르는 듯한
환시(幻視)


시그널... 번번이 헛짚는 노다지, 하염없는 칸델라의
불빛.
원뢰(遠雷)... 얼어붙은 균열(龜裂).
도넛처럼 따수한 연기를 지평선
너머에서 퐁퐁 밀어올리던
소년의 마음이 식어간다, 호주머니
속에서 싸늘하게


우주의 평형(平衡)과 뻥뻥 구멍 뚫린
신(神)이
끈에 꿰어 겨울 땅바닥에
다만 태질이나 하고 있는


슬프고 검은
우리들의
기다림





# 뽕짝이라는 단어가 언제부터 정겹게 다가왔을까. 아마도 마흔 이후가 아니었나 싶다. 시인의 오래된 시를 읽으면서 뽕짝을 듣는다. 시집 맨 앞장에 실려 당신의 모습을 투영한 것 같은 별사를 옮긴다. 시인의 말이거나 자서라 해도 되겠다.



별사(別辭)



보라 저 눈 트는 꽃잎
보라 저 걷고 있는 나무


어느 길손에게
잃어버린 노래를 물으랴


나 평생 헛된 꿈만 꾸고 살아왔구나


종 울고 해 기울어서 일어나
길 떠날 채비 이제야 하느니


가자 저 바람 속으로


가자 물보라 지는
바다의 저 어질머리


가자 님의 가슴 속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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