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봄날은 안녕하다 - 김명기

마루안 2018. 4. 23. 22:07



봄날은 안녕하다 - 김명기



삶과 죽음의 경계 명확한
도축장 한 귀퉁이
벙글 대로 벙근 목련 진다!
그 그늘 아래 조팝꽃 한창이다
죽음 대수롭지 않은 여기
목 떨어지고 다리 잘린, 속내까지 다 파헤쳐진
핏빛 축생의 응고되지 않은 주검을
이리저리 끌고 밀며 다니는 내가 안녕하듯
저렇게 지는 꽃그늘 속 또 다른 생은 안녕하다
세상 어느 귀퉁이에는 누군가의 찬란한 치장을 위해
팔 다리 잘린 아이들이 절룩절룩 자라고
그 애비들 평균 수명은 마흔이 채 되지 않는다는데
그토록 비참한 얘기마저 이 봄 같은 홀망한 날
막 봉오리 터뜨린 여남은 송이 철쭉처럼
군데군데 자줏빛 핏방울 번지는 작업복 위로
이 살풍경의 배후 같은 햇살이 기울고
그 사이 꽃잎 몇 장 더 떨어지고
떨어진 꽃잎 몇 장 끌고 다른 꽃을 밀어 올리며
이렇게 안녕하신 봄날은 가고 있다



*시집, 종점식당, 애지








문득 - 김명기



곡우 무렵 내리는 옅은 비처럼
문득 나를 적시는 당신
혹시 당신 없는 동안 다 말라 버린 내가
쩍쩍 갈라지는 불모지라도 될까 싶어
어디 먼데서 문득이 되어버린 사람


순간 나는 당신이 울대 너머로
마른 눈물조차 꾹꾹 밀어 삼키던
그때 그대로이길 바라는
부디가 되는데


할 수만 있다면 지금이라도 제발이 되어
한 번도 한 적 없는 허튼 맹세라도 하고 싶은
당신


한때 내게 그렇게 불리던 사람
숨 쉴 때마다
정교하게 털썩대는 늑골 사이
안으로 내 안으로만 드나들던 가느다란 숨소리처럼
그저 내밀하기만 했던





# 김명기 시인은 1969년 경북 울진에서 태어나 태백에서 성장했다. 관동대 산업공학과를 졸업하고 2005년 계간 <시평>으로 등단했다. 시집으로 <북평 장날 만난 체 게바라>가 있고 <종점식당>은 두 번째 시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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