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고장난 사내 - 고찬규

마루안 2018. 4. 23. 21:47



고장난 사내 - 고찬규



두 개의 창살이 만드는
석 장의 볕이 유일한 낙이었다
아무도 찾지 않는 빈 그네처럼
삐걱삐걱
드물게 움직이는 사내.


사내를 따라
먼지는 하루살이처럼 몰려다니며
더 많은 먼지들을 낳고, 낳고, 낳고
죽어라고 낳고 있거나
앞다퉈 볕에 타 죽는다.


환등기처럼 깜박이는 두 눈으로
간혹,
강물이 출렁이고
한가로이 풀을 뜯는 염소와
나비를 쫓는 아이.


사내는 해바라기였다
가부좌를 튼 채
얼굴 가득 검버섯을 박아 넣고
돌고 돌았다 점차
눈동자가 한 몸을 대신하게 됐다


어디선가 백목련 지는 소리.



*시집, 핑퐁핑퐁, 파란출판








이유 - 고찬규



열매는 그다음 일
잎보다 꽃을 먼저 내보내기 위한 것이었으니
사과나무에게 겨울은 그런 것이었으니
참으로 갸륵하다
꽃이 피는 이유만으로


꽃이 피는 이유만으로
내 눈이 내 귀가 새삼 심장박동 소리가
새롭다 내 몸이 내 맘이
꽃이 피는 이유만으로 삼라만상이
다 이유가 되고


다 용서가 되니
울다 울다 울다 지쳐 울던 새들도
갈 것이라 왔다 봄도 사랑도
봄이 오는데 새삼 무슨 이유인가
가려고 온다 봄은
눈물 채 멈추기 전에





# 고찬규 시인은 1969년 전북 부안 출생으로 경희대 국문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 석사 과정을 수료했다. 1998년 <문학사상>을 통해 등단했다. 시집으로 <숲을 떠메고 간 새들의 푸른 어깨>가 있고 <핑퐁핑퐁>이 두 번째 시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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