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쿠킹호일로 만든 세상 - 서석화

마루안 2018. 4. 22. 22:33



쿠킹호일로 만든 세상 - 서석화



반짝이는 것은 구겨진다


밤새 창문을 밀치던 달빛도

내 눈빛을 잡아 끌던 대낮의 고요도

역사를 만들어내는 사람들의 말소리도


오랜 시간

반짝이는 것을 통째로 믿은 적이 있었다

누군가의 웃음이 조금씩 폐허로 내몰아도

그 황량하던 마음 끝자리

구겨진 세상이 나를 기다린다는 생각

하지 못했다

손대기 직전의 쿠킹호일처럼 그 웃음

나를 향해 반짝이는 영원한 빛남이라 믿었다


구겨진다는 말이 사는 일속에

치러야 하는 노동처럼 익숙한 발음으로

튀어나오던 날

쿠킹호일 한 통을 휴지처럼 구기며

나는 웃었다

이렇게 쉽게 하나씩 사건을 구겨가며

한 생이 가는구나

꿈 속의 호화궁궐도 깨고 나면 나 움막에

버려놓은 것을


구겨진 쿠킹호일도 반짝인다

구겨짐 속에서 그래도 이어지는 세상을 본다


차라리 그것이 순결하다



*시집, 종이 슬리퍼, 나남출판사








마지막 4월 - 서석화



소주 넉 잔이 필요했다

철지난 유행가 몇 소절도 필요했다

달빛보다 더 환한 목련나무 아래서

고요한 슬픔 길을 내며 일어섰다

서 있는 곳마다 절망의 풀씨가 날렸다

신발코 닿는 곳은 어디나 땅 끝이었다

단 하나의 약속도 함께 할 수 없었다

준비된 말 늦추고 있는 눈빛조다

목련꽃 갈피갈피 숨길 수밖에 없었다

기대없이 바라보기엔 등자락이 너무 아팠다

앙상한 늑골 속엔 차가운 회오리가 돌았다

한밤의 하늘도 태웠던 사람 목소리 끊긴 시간

깨어나지 않을 적막 속에 나는 버려졌다

목련꽃 떨어질 때마다 달도 떨어져내렸다

캄캄한 두 사람의 등은 그렇게 점점 멀어져 갔다

누군가의 울음소리가 밤하늘을 찢으며

날아다니고 있었다

잠실 사거리에 봄이 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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