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큰 꽃 - 이문재

마루안 2018. 4. 22. 17:47

 

 

큰 꽃 - 이문재


꽃을 내려놓고
죽을 힘 다해 피워놓은
꽃들을 발치에 내려놓고
봄나무들은 짐짓 연초록이다.

꽃이 져도 너를 잊은 적 없다는
맑은 노래가 있지만
꽃 지고 나면 봄나무들
제 이름까지 내려놓는다.
산수유 진달래 철쭉 라일락 산벚-
꽃 내려놓은 나무들은
신록일 따름 푸른 숲일 따름

꽃이 피면 같이 웃어도
꽃이 지면 같이 울지 못한다.
꽃이 지면 우리는 너를 잊는 것이다.
꽃 떨군 봄나무들이
저마다 다시 꽃이라는 사실을
저마다 더 큰 꽃으로 피어나는 사태를
눈 뜨고도 보지 못하는 것이다.

꽃은 지지 않는다.
나무는 꽃을 떨어뜨리고
더 큰 꽃을 피워낸다.
나무는 꽃이다.
나무는 온몸으로 꽃이다.


*시집, 지금 여기가 맨 앞, 문학동네


 

 



낙화 - 이문재


바람 한 점 없는데
하르르-
꽃잎 하나 떨어진다.

하염없다고 말하려다가 말았다.
애도하는 것이라고 중얼거리다가 말았다.
자진하는 것이라고 하려다가 말았다.
중력을 떠올리려다가 그만두었다.

휴대전화가 부르르-
받지 않았다 받을 수 없었다.
지금 떨어진 저 꽃잎은
누군가 나에게 보내는
전파에 맞은 것인지도 몰랐다.

한밤중에
홀로 떨어지는 꽃잎들이 있다.




# 이문재 시인은 1959년 경기도 김포 출생으로 경희대 국문과를 졸업했다. 1982년 <시운동>에 시를 발표하며 등단했다. 시집으로 <제국호텔>, <마음의 오지>, <산책시편>, <내 젖은 구두 벗어 해에게 보여줄 때>, <지금 여기가 맨 앞>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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