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지렁이만큼이나 외롭고 쓸쓸하게 - 최서림

마루안 2018. 4. 19. 22:07



지렁이만큼이나 외롭고 쓸쓸하게 - 최서림



마당 저쪽 채송화가 먼지를 두껍게 뒤집어쓰고 있다
여우비에 반쯤 씻기다 말고 얼룩얼룩하다
한때 빨치산에 부역했다
머슴, 소작농, 칼갈이, 노가다로 전전하다
노점상으로 생을 마감했다
조문객도 드문드문한데 하나뿐인
플라스틱 화환이 가을빛에 바스러진다
건너편에 뭐가 있길래 앞도 못 보는 지렁이가
마당을 가로질러가다 조문객 발에 밟혀 허기가 잘렸다
개미떼가 잽싸게 달려들어 뜯어먹고 있다
색 바랜 인조 화환 밑으로
외롭고 쓸쓸한 지렁이의 장례 행렬이 길다
모래바람 서걱거리는 이 메마른 세상
가늘고 긴 목숨, 지렁이처럼 이어왔나
무엇에 이끌려 여기까지 헐떡헐떡 기어왔나
동굴 속은 한낮에도 캄캄하다



*시집, 버들치, 문학동네








봄날 2 - 최서림



대낮에 켜진 가로등처럼
벚꽃이 너무 눈부셔 쓸쓸한 봄날,
모래먼지 풀풀 날리는 그녀의 봄날이
삽날에 잘린 지렁이처럼 그렇게
말라비틀어지며 기어서 간다
길이 보이지 않는 가슴 속에서
이리 비뚤, 저리 비뚤, 서둘러서 지나간다
천지사방을 할퀴며 간다
그녀의 봄은 칼날을 품고 있다 때론
아플 정도로 황량해서 아름다운 生도 있다





# 묘한 슬픔이 묻어나는 시다. 새로운 것과 편리함만을 쫓는 사람들은 발견하지 못할 풍경이다. 햇살을 그리워하는 불행한 삶에도 펄떡거리는 생기가 숨어 있는 법, 누구의 인생이든 우주를 품고 있는 법, 열심히 살고도 실패한 삶을 사랑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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