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노래하지 않는 새 - 현택훈

마루안 2018. 4. 15. 18:59



노래하지 않는 새 - 현택훈



구름이 태양을 멸망시켰으나
바람이 다시 구름을 멸망시켰다
이별은 생김새가 정연하여
가독성이 높으므로
나는 그리움을 선호하면서도
슬픔을 취미로 삼아왔다
쓸쓸한 기항지로 가는 뱃길에서
얼마나 많은 흐린 명조체의
풍랑을 맞이했던가
수백 마리의 나뭇잎이 떨어지는
꿈을 꾸던 밤에도
나는 파랑주의보를 들이켜고 있었다
그러니까 유성우가 있다고 했지만
창을 열 수 없는 밤이 흘러간 것이다
별똥별이 연신 떨어지는 밤하늘을
어떻게 목도할 수 있을까요
밤의 음악이 흐른다고 하지만
차마 들을 수 없는 나날인 것이다
이별의 바다에서 밤을 보내며
나는 생각한다
당신의 수위를 재는 일은
안개의 무게를 재는 것만큼
막막한 일이라는 것을.....
나는 어디로 떨어지고 있는 것일까
꿈은 어디까지 올라갔다가
별똥별처럼 떨어지는 것일까
나는 어느 별의 위성이었을까
유언 같은 삶도 그리 멀리 가지 못하고
기억이 이별을 멸망시켰으나
회한이 다시 기억을 멸망시켰다



*시집, 남방큰돌고래, 한국문연








마음의 곶자왈 - 현택훈



내 마음 어느 곳에 곶자왈이 있어서
용암처럼 흐른 아픔이 굳어서
비가 빛나고 햇빛이 내리는 수풀 속에서
멀리 가지 못하고 머문 홀씨 같은 슬픔이 있어서
열대와 한대의 수목한계선이 서로 겹쳐서
습지엔 기억의 눈물이 질척거려서
쓸쓸한 바람이 고이는 곳이어서
제주고사리, 개가시나무, 때죽나무 우거진 그리움이어서
날씨란 지나고 나면 모두 흐림이어서
비 그치면 산책을 하는 것이어서
슬픔이 빛나고 당신이 내리는 숲이어서
희망도 절망도 그곳에선 서로 겹쳐서
나뭇잎들 사이로 보이는 하늘이 있어서
아프게 증산작용을 하는 나무가 푸르러서
흐린 날도 오래되면 맑게 흐릴 수 있어서
바람이 고였다가 다시 바람을 일으켜서
슬픔도 고이면 거름이 되어서
인공호흡기처럼 내 마음을 지탱해줘서
내 마음 어느 곳에 곶자왈이 있어서





# 이 시집에는 제주 태생이 아니면 쓰기 힘든 시가 많다. 곶자왈은 제주 토속말로 자갈밭산이라 보면 되겠다. 생태 학술적으로 용암이 어떻고까지 동원할 필요는 없다. 척박한 땅에서 살아남은 제주 사람들의 상처를 잘 다독인 시편이다. 지금이야 외지 사람들로 많이 오염이 되었지만 예전 그 땅에서 살았던 사람들은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처절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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